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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⑫‘1와인 2핀초’ 먹고 일하러…스페인 작은 마을서 본 인생의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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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회 작성일 19-10-12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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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⑫‘1와인 2핀초’ 먹고 일하러…스페인 작은 마을서 본 인생의 낙

산세바스티안 구시가지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타파스 바다. 하루 종일 들고 나는 손님들은 선 채로 간단한 음식과 함께 와인 한잔의 여유를 즐긴다.
산세바스티안 구시가지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타파스 바다. 하루 종일 들고 나는 손님들은 선 채로 간단한 음식과 함께 와인 한잔의 여유를 즐긴다.

작년 세계 최고 미식 여행지 1위
인구 대비 미쉐린 스타 식당 최다
막상 가 보면 핀초에 와인 곁들이는
타파스 바가 한 집 건너 한 집

맛 의심 품고 간 의자 없는 식당서
인생 ‘푸아’·인생 문어를 만나
가게·메뉴, 현지인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알려주었는지 이해돼

스페인 독재서 벗어난 ‘바스크’
자신들의 정체성 지키려는 노력
지리·역사와 연결시킨 요리들
세계적 음식문화로 발전한 원동력

전 세계에서 가장 미식여행을 하기 좋은 도시는 어디일까? 영국의 케이터링 온라인 플랫폼 케이터윙스(Caterwings)가 발표한 ‘2017·2018 최고의 미식 여행지’ 100개 도시 리스트에 의하면 1위는 스페인의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an), 8위는 바르셀로나였다.

산세바스티안이 1위를 차지한 이유 중 한 가지는 전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미쉐린 스타를 받았거나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순위 상위권에 포함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이 많을 수밖에. 하지만 실제로 찾아가보니 타파스(tapas) 바들 또한 아주 흥미로웠다. 삼면이 해변으로 둘러싸여 작은 반도처럼 생긴 구시가지는 그야말로 한 집 건너 한 집이 타파스 바였다. 이 지역에서는 타파스 대신 핀초스(pintxos)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핀초도 타파처럼 작은 접시에 내는 요리다. 둘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보통 핀초는 바게트 빵 위에 요리(하몬, 소시지, 대구살 등)를 올리고 이쑤시개로 고정해놓은 형태를 가리킨다.

오전부터 들이닥친 단골손님에게 와인을 따라주는 주인의 표정이 환하다.
오전부터 들이닥친 단골손님에게 와인을 따라주는 주인의 표정이 환하다.

대부분의 바에서는 미리 만들어둔 핀초스를 테이블 위에 쫙 깔아둔다. 하지만 보통 집집마다 있는 대표 메뉴 몇 가지는 별도로 주문해야 한다. 미리 바게트 빵 위에 생선, 고기, 채소 등을 올려둔 핀초는 2유로(약 2600원), 즉시 주문해서 따뜻하게 먹는 요리형 핀초는 2.7~5유로(약 3500~6500원) 정도 한다. 며칠간 타파스 바를 순례하면서 관찰한 결과, 아무리 작은 바에도 술이 15종류 이상, 큰 바에는 40종류 이상 있어서 요리와 술을 맞추어 먹을 수 있었다. 아직 오전인데도 장 보러 갔다 온 아저씨들, 볼일 보고 지나가던 아줌마들은 바에 들어오면서 큰소리로 술 이름을 외치곤 했다. 주인과 요란스레 인사를 하고, 술을 한잔 하면서 핀초스 한두 개를 집어먹은 뒤 다시 일을 보러 나가는 것이 인생의 큰 낙인 듯했다.

■ 산세바스티안에 사는 낙

유명한 타파스 바 ‘보르다베리’에서 맛본 ‘인생 문어’.
유명한 타파스 바 ‘보르다베리’에서 맛본 ‘인생 문어’.

산세바스티안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타파스 바는 라 쿠차라(La Chuchara)였다. 의자가 하나도 없는 공간이라 서서 먹고 마실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선술집’인데, 빽빽이 서면 20명쯤 들어간다. 관찰해보니 1인당 평균 20분 정도 서서 와인 1잔에 핀초 2개 정도를 먹고 나갔다. 저녁에는 시간당 무려 30~40명이 거쳐 갔다. 아무리 바빠도 미리 만들어서 테이블에 깔아둔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메뉴가 주문과 동시에 조리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먹어야 좋을까? 직원이 가장 자신 있게 권한 것은 ‘푸아(foie)’였다. ‘푸아 그라(foie gras)’가 아니고 ‘푸아’라고 하다니, 자연적인 방식으로 길러낸 동물의 건강한 간일까? 프랑스의 대표음식 중 하나로 잘 알려진 푸아 그라는 거위나 오리의 지방간이다. 억지로 음식을 먹이는 ‘가바주(gavage)’라는 방식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동물애호가들의 지탄을 받기도 하거니와, 압착 방식으로 생산한 대부분의 가공품 푸아 그라가 나에게는 너무 비리기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온 것은 작고 신선한 간을 살짝 구운 것이었다. 예전에 미쉐린 2스타 식당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맛있다는 생각이 드는 품질이었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의 분위기, 서비스, 미학성은 없어도 ‘인생 푸아’라 할 만했다. 이어지는 문어구이, 대구구이, 리조토 모두 너무나 맛있어서 바로 구글맵을 켜 리뷰까지 남겼다.

고객을 무조건 서서 먹게 하는 곳은 얼마나 맛에 자신이 있는 걸까. 역시 의자가 없는 유명한 보르다베리(Bordaberri)는 나에게 ‘인생 문어’를 선사했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돼지 볼살, 이디아사발(바스크 지역 특산 치즈) 리조토도 강력 추천할 만한 맛이었다. 이 동네 최고의 새우구이로 가장 유명한 고즈아르기(Goz-Argi)의 새우구이와 오징어구이도 잊을 수 없다. 현지인들이 왜 그렇게 타파스 바와 그곳의 대표 메뉴 두어개씩을 열심히 써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스페인 음식 혁명의 기원

천장에 돼지 뒷다리가 있는 전형적인 타파스 바.
천장에 돼지 뒷다리가 있는 전형적인 타파스 바.

작은 도시인 산세바스티안에서 어떻게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일상적으로 즐기는 미식문화가 만들어진 것일까? 현대 스페인 음식을 만든 아버지 중 한 명으로 통하는 후안 마리 아르삭(Juan Mari Arzak)의 공이 크다.

후안 마리 아르삭은 그의 할아버지가 1897년에 시작한 식당 아르삭(Arzak)을 물려받아 3대째 운영하면서 미쉐린 3스타, 월드 레스토랑 랭킹 상위권(20일팔년 31위) 식당으로 키워낸 셰프이다. (지금은 그의 딸인 엘레나 아르삭이 4대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로시 송(H. Rosi Song)과 안나 리에라(Anna Riera)가 쓴 <바르셀로나의 맛>에 의하면, 후안 마리 아르삭은 1970년대 ‘아방가르드 바스크 음식’ 운동을 이끌며 스페인 음식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이다. 페란 아드리아와 같은 전설적인 셰프들이 나온 것도 그가 먼저 길을 닦아둔 덕분이다.

원래 바스크 지역은 국경 너머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미식문화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1970년대 들어 미식클럽, 요리학교가 생길 정도로 미식을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곳 셰프들은 바스크의 고유한 음식 전통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특히 후안 마리 아르삭은 밴에 테이블을 싣고 돌아다니다가 마을 광장에 주방을 차리고 전통 바스크 요리법을 사람들에게 선보일 정도로 정열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76년 제1회 스페인 미식 원탁회의가 바스크 지역 기푸스코아(Gipuzkoa)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계속 모임들이 이어졌고, 1984년 역시 바스크 지역에서 열린 미식 대회에 젊은 페란 아드리아가 참석한 것이 스페인 음식 혁명의 기원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혁명이 하필 바스크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지역 음식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은 정치적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당시는 현대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시기, 즉 프랑코 독재가 끝난 후 민주주의로 전환하던 시기다.

지역 문화와 언어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끝나고 각 지역 고유의 관습이 인정받으면서 바스크, 카탈루냐 등의 지역이 정치적으로 인정받게 된 때이다. 이때 지역의 음식 전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재해석하고 전파할 것인지를 탐구하는 셰프들이 나타났다. ‘전통적인 음식 지식과 미학을 발전시키되 지리, 문화, 역사와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이처럼 지역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음식이 발전하는 현상은 근대 이후 많은 나라들에서 나타났다. 오늘날 산세바스티안을 포함한 바스크 지방,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포함한 카탈루냐 지방에 유명한 셰프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두 지역의 공통점은 분리독립운동을 할 정도로 독특한 문화와 강력한 정체성 때문에 많은 여행자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 내 고향의 역사를 담은 맛

바스크 지방의 전통 축제에서 어른 분장을 하고 행진하는 어린이들.
바스크 지방의 전통 축제에서 어른 분장을 하고 행진하는 어린이들.

외지의 여행자들이 몰려들다 보면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마련이다. 관광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린우드는 1977년 바스크 지역의 유명한 성곽 도시 온다리비아(Hondarribia)의 전통 의례인 알라르데(Alarde)의 변천 과정을 기술하면서 관광이 현지 주민의 문화를 망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까지 나온 것을 보면 1970년대 바스크 지역에 여행자들이 엄청나게 몰려왔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과도했던 것 같다. 바스크 문화의 일부인 바스크 음식은 오히려 정체성이 강화되었고, 이 음식문화가 스페인은 물론 글로벌 음식문화 발전까지 선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후 수십년간 많은 관광인류학자가 밝혀낸 것처럼, 관광이 현지 문화를 살려내고 보존하는 경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산세바스티안에서의 마지막 날, 우연히 지역축제를 보게 되었다. 관악기와 타악기 밴드를 만들어 연주하는 어른들, 산에서 양 치던 목자의 옷을 입고 ‘막대기 춤’을 추는 청소년들, 전통 복장을 하고 어른처럼 꾸민 채 작은 프라이팬을 망치로 두드리며 행진하는 어린이들이 마을 곳곳에서 보였다. 밤에는 노인들이 전통 복장으로 노래하며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다들 어찌나 몰입하는지 성스러운 종교의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매해 계절마다 이런 축제를 반복하면서 공동체를 성스럽게 가꾸어가는구나.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장 지역적인 곳에서 가장 세계적인 음식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았다.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는 주민들.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 부르는 주민들.

바스크의 전통 음식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 했던 후안 마리 아르삭 덕분에 오늘날 스페인의 모든 셰프들은 크게 2가지 길을 선택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는 페란 아드리아와 그의 팀들이 추구하는 아방가르드 방식으로 최신 기술과 새로운 첨가물들을 이용해 맛을 극한까지 몰고 가는 글로벌한 트렌드를 따르는 것. 두 번째는 네오클래식 방식으로, 과거의 레시피를 잘 살려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란 아드리아의 식당을 거쳐간 전 세계 셰프 수천명은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문화와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다 보면 방향이 보이지 않을까.

▶필자 이민영



덕업일치를 꿈꾸는 관광인류학자. KBS 여행 전문 팟캐스트 <여행상상> 진행자. 여행작가·해외여행인솔자로 70여개국을 다니며 미식, 스쿠버다이빙, 자전거, 요가, 순례 등 다양한 테마여행을 탐구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인의 해외관광문화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원문보기: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910092116005&code=350102#csidxaec113d4c4ccb66a5f4e360959c2b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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