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사유와 성찰]기독교,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p></p><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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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04:26 조회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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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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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재난마다 드러나는 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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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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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사랑의 실천 선도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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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초기 개신교는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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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에 동참하는 교회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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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정답은 뭔가요?” 여러 해 전 내가 쓴 소책자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를 읽고 한 학생이 내게 물었던 질문이다.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정답이 책에는 안 나오죠? 독자가 각자 답해보라는 의미겠지요.” 코로나 시대, 다시금 묻고 싶은 질문이 되었다. 인류 전체가 재난에 시달리는 지금, 종교는 누구를 위한 종교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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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가가 사회적 재난을 경험할 때 한국의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생각해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묘하게도 최근 국가의 굵직한 재난이 닥칠 때마다 기독교의 모습을 띤 이단 종파의 숨겨진 이야기가 노출되곤 했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이름을 내세운 구원파의 교주 유병언씨가 세월호 선사 청해진의 실소유주로 알려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고, 국정농단 사건 때는 특별검사의 핵심수사 내용 중 하나로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천도교 등을 융합한 영세교를 창시한 고 최태민씨와의 연관성을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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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인해 또 다른 이단종파인 신천지 예수교회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연이어 “대한민국이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전광훈 목사의 기괴한 행태와 교회발 집단감염으로 인해 적잖은 일반 국민들에게 기독교인들 전체가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처럼 인식되고 있다. 국가 재난이 닥쳤을 때, 정부나 일반 국민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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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 가운데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국가 전체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선도적인 역할을 대조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조선 땅에 기독교가 뿌리 내릴 수 있었던 사건도 국가 전체가 전염병과의 대대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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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장 무서운 전염병은 콜레라였다.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고 만주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한양을 덮쳤다. 조선 정부는 가장 먼저 연희전문학교 교장인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애비슨 박사는 즉시 방역대를 조직하고 곳곳에 전담 진료소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소외된 계층의 민중도 읽을 수 있도록 쉬운 한글로 포고문을 만들어 사방에 붙이고 멸균을 위해 물 끓여먹기와 손씻기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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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치사율이 거의 90%에 육박했던 당시 조선 민족은 이러한 운동 덕분에 감염자의 60% 이상이 살아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콜레라가 악귀로 인해 생기는 병이라고 부적을 붙이던 조선 민족들에게 단순히 과학적인 방역지식을 전달한 것이 기적을 일으킨 주요 원인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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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 민족은 처음으로 신분을 가리지 않는 평등한 사랑을 체험했다. 그리고 가족들도 멀리 했던 전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간호하는 선교사들이 보여준 실천을 목격했다. 외계인처럼만 여겨졌던 서양 선교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재난 한복판으로 뛰어든 그들의 실천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전염력을 가지고 희망을 가져다준 기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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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앞에 선 기독교,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그저 예배 자리를 지켜내는 일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면예배 금지조치에 발끈하는 교회가 되어선 안 된다. 인류 전체가 경험하는 혼돈 속에서 신체적, 경제적 그리고 심리적 아픔을 당한 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평화운동가 이시우 사진작가는 ‘아픈 곳이 몸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이라 말한다. 세상의 중심은 전광훈 목사도 아니고 광화문도 아니다. 세상의 아픔, 그래서 세상의 중심으로 향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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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촌(江村) /두보(杜甫)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 한 구비 이 마을을 안고 흐르는데,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 강촌에는 만사가 한가롭다.

自去自來梁上燕, (자거자래당상연) 절로 갔다 절로 오는 것은 들보 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 (상친상근수중구)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이하는 것은 물 위의 갈매기라.

老妻畵紙爲碁局, (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줄 그어 바둑판을 만들고,

稚子敲針作釣鉤. (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들은 바늘 두들겨 낚싯바늘 만드는구나.

多病所須唯藥物, (다병소수유약물) 병약한 몸에 필요한 것이라곤 그저 약물 뿐,

微軀此外更何求. (미구차외갱하구) 하찮은 이내 몸이 이 밖에 또 무엇을 바라리오.



화석정 / 율곡 이 이


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

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

바위 / 청마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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