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의 진짜 권력은 검찰과 언론이다.
2. 교육, 의료, 주거는 시장에 맡기면 안된다.
3. 중대 재해 기업 처벌법을 제정하라.
사설

[지금, 여기]굿바이,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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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2-21 18:32 조회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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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때 나는 공장노동자였다. 낮에는 구두공장에서 일했고, 저녁에는 야학에서 공부했다. 공장일 마치고 옆구리에 책을 끼고 야학에 갔다. 시력과 무관하게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것도 그쯤이었던 것 같다. 딴엔 ‘공돌이’가 아니라 대학생으로 봐주길 바랐던 것이다. 겉으로는 그랬지만, 속으로는 노동자의 정체성을 키우고 있었다. 가방에는 늘 야학 교사(고려대학교 ‘자진근로반’)가 건네준 문건,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담겨 있었다. <전태일 평전>이 나오기 전에 ‘전태일 평전’을 읽은 셈이다.


문건에서 책으로 변신한 <전태일 평전>(이하 ‘평전’)을 처음 만난 건 대학에 들어간 뒤였다. 저자가 조영래 변호사라는 것도 그때야 알게 되었다. 이후 ‘평전’ 읽기를 반복했다. 삶이 팍팍하다거나 의지가 꺾일 때, 외롭고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습관처럼 책장에서 ‘평전’을 뽑아 들었다. 여러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웠고, 늘 속이 울렁거렸다.


올해 나온 50주기 기념 개정판은 사지 않았다. 책을 사고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제 ‘평전’을 그만 읽을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책만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고,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 전태일만 우려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회의가 깊어진 건 ‘희망버스’ 출진 즈음이었다. <소금꽃나무>(김진숙 저, 후마니타스 간)에 나오는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2003년에 죽은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는 대목에서 생각이 멈춰섰고, 고뇌가 깊어졌다. 책보다 잔인한 건 현실이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과 2003년에 죽은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2016년 구의역에서 죽은 김모군과 2018년 죽은 비정규노동자 김용균, 2020년 죽은 택배노동자들의 소망이 같은 나라. 어처구니없는 끝말잇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전국적으로 다채로운 추모행사가 열렸다. 정부는 열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방송은 앞다퉈 기념 프로그램을 송출했다. 일군의 사람들은 열사의 고향 대구를 방문해 추모의 열기를 이어갔다. 문화예술계의 추모 바람은 진행형이다. 열사의 뜻을 기리는 뮤지컬과 애니메이션 등이 기획단계이거나 제작 중이란다. 반세기 만에 비로소 전태일 열사를 ‘제대로’ 추모하는 느낌이다.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웠고 감동적이었다. 아연 뭉클하기도.


그런데 정작 열사가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구호에 대한 답은 없다. 뒤늦게나마 산업재해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거대 여당의 무관심과 외면으로 인해 소수 정당의 입법활동은 난관에 부딪혔다. 50년 전에 죽은 열사는 추모하면서, 불과 며칠 전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생을 마감한 항공사 승무원의 죽음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던 열사의 외침에는 이렇게나 크게 답을 하면서, 정작 다음달에 내야 할 월세와 전기료를 남겨둔 채 아무 말도 없이 생을 마감한 가난한 모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다.


전태일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그 정신을 통해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환기하고 나아가 노동의 조건과 환경을 바꾸자는 것인 줄 안다. 반대할 이유도, 깎아내릴 까닭도 없다. 다만, 언제부턴가 전태일과 현실의 노동이 따로따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전태일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것 같다. 전태일이라는 면죄부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와 부당함, 불평등을 덮어버리려는 음험한 세력이 준동하고 있는 것 같다.


<역사란 무엇인가> 출간 40주년을 맞아 <굿바이 E. H. 카>(데이비드 캐너다인 저)가 나왔다. 카의 해체가 곧 그의 진보적 역사관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취지에서다. 이제 전태일 앞에서 멈춰선 발걸음을 계속 이어갈 방법을 고민할 때다. 새로운 발걸음이 시작될 것이다. 굿바이,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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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촌(江村) /두보(杜甫)


淸江一曲抱村流, (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 한 구비 이 마을을 안고 흐르는데,

長夏江村事事幽. (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 강촌에는 만사가 한가롭다.

自去自來梁上燕, (자거자래당상연) 절로 갔다 절로 오는 것은 들보 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 (상친상근수중구)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이하는 것은 물 위의 갈매기라.

老妻畵紙爲碁局, (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줄 그어 바둑판을 만들고,

稚子敲針作釣鉤. (치자고침작조구) 어린 아들은 바늘 두들겨 낚싯바늘 만드는구나.

多病所須唯藥物, (다병소수유약물) 병약한 몸에 필요한 것이라곤 그저 약물 뿐,

微軀此外更何求. (미구차외갱하구) 하찮은 이내 몸이 이 밖에 또 무엇을 바라리오.



화석정 / 율곡 이 이


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

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

바위 / 청마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때도
참아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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