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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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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6-03 18:38 조회 2,4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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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부터 복통이 생겨 잠을 못 잤다. 순찰 나온 병정더러 약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깜깜소식이었다. 체증인 듯싶어 여주인에게 소금을 좀 달라고 했으나 가지고 있는 소금이 없다고 했다. 이웃집 노인이 무슨 약초인지 냄새도 고약하고 지독하게 쓴 맛이 나는 약물을 가져와서 주기에 무조건 마셔버렸다. 조금 후 구토와 설사를 몇 번 반복했다. 그 후에야 배도 가라앉고 편하게 잠이 들었다. 지옥에서 또 한 번 부처를 만난 셈이었다.

대자연은 그 순환이 어김없다. 또 날은 밝고 해가 떠올랐다. 지난밤의 복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다리가 휘청거리고 귀울림 증상이 심했다. 냉수만 마시고 한나절을 지냈다. 온 몸의 힘이 빠진 듯 기운이 없어 누워있는데 갑자기 인민군 대좌 한 사람이 찾아왔다. ‘또 세뇌를 위해서 온 것이겠지.’ 라는 생각에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옥에서 만난 부처도 아니고 염라대왕이나 저승사자도 아니었다.

그의 특유의 왕방울 같은 눈망울을 가진 육사 동기생 강태무 라는 녀석이었다. 그가 친구든 적이든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 자체가 기쁘기만 했다. 서로가 아무 말도 못하고 손을 마주 잡고 눈물만 흘렸다. 잠시 강태무에 대한 소개를 해야겠다.

나와 비슷한 연령층이라면 강태무 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나와 같은 육사 2기생이다. 그와는 강릉대대에서 중대장으로 함께 근무했었다. 나와는 성격이 맞아 잘 어울렸고 친하게 지내다 헤어졌다. 그가 춘천연대에서 대대장으로 지낼 때 38선에 배치되었었다. 그 당시 강태무는 대대병력 일부를 인솔하여 38선을 넘어서 월북을 했다. 이정도로 그에 대한 소개는 충분할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로 말문을 열었다. 국방군 대령으로 2기생 임 모가 왔다는데 이름은 정확하지 않아도 2기생은 틀림없으니 자기가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자원해서 왔다고 했다. 그의 별명인 ‘헤드라이트’처럼 튀어나온 큰 눈이 번득 거리기는 했으나 그 뒤에 담긴 애수의 그림자는 감추지 못했다.

그의 몰골은 안타깝기만 했다. 때가 7월 하순 한 여름인데 군복은 동복을 걸치고 있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낡은 미제 벨트를 허리에 감고 있었다. 신고 있던 장화를 벗으니 양말이 아니고 헝겊으로 발을 감싼 정도였고 내의도 여기저기 구멍이 난 낡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몹시 더운지 옷을 훨훨 벗어던지더니 골자기로 내려가서 목욕을 하고 올라왔다.

나는 그에게 근황을 물었다. 그는 우물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그는 나에게 레코드판이라도 틀어놓은듯 같은 말을 반복하며 먹히지도 않는 세뇌공작을 벌이다가 지쳤는지 어딘가를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사라졌던 그는 석양에서야 돌아왔다. 무엇인가를 들고 와 여주인에게 속히 준비하라며 건네주었다. 그리고 신병인수를 했으니 오늘 밤에 자기와 평양으로 가자고 했다. 얼마 후 안주인은 밥상을 가져왔다. 반찬도 몇 가지와 쌀밥이었다. 나는 조금 뜨고 그 집 꼬마에게 주었다.

뜨겁던 여름 해도 넘어가고 저녁때가 되었다. 쓰르라미 소리만 산마을의 적막함을 달래주었다. 여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니 나에게 약물을 가져다 준 노인도 나왔다. 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그들은 눈으로 잘 가라는 듯 인사를 했다. 그들이 사는 곳은 공산치하지만 주민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산골자기를 내려서니 큰 길에 소련제 지프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었고 인민군 대위 한 사람과 운전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 장교 같은 자가 강태무로부터 서류를 한 장 받아갔다.

그곳은 황해도 훌동이라는 곳으로 광산촌이었다. 미군 포로들이 그곳에 투입되어 노역을 하고 있었다. 부근의 철도역까지 공중에 색도(케이블카)가 가설되어있어서 전쟁 중에도 밤낮 쉴 새 없이 광석을 날랐다고 했다.

<지옥로 7가>
지프차가 출발했다. 지옥의 종착역이 될지 모르는 그곳을 향해 떠났다. 날은 이미 저물어서 어둑어둑했다. 광산용 도로인 듯 굴곡이 심하고 도로폭도 좁은 산 비탈길을 헤쳐 나갔다. 한참 가다가 폭이 제법 넓은 강을 건넜다. 물이 차의 밑바닥까지 올라올 정도로 깊은 듯 했으나 용하게도 물에 안 빠지고 건너갔다. 그때까지 숨겨가지고 다니던 권총을 버리기로 했다.

둔한 중공군 놈들은 대범했지만 인민군들은 인종이 다르지 않은가.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물을 건널 때 슬쩍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시원섭섭했다.

자동차는 강가의 푸른 풀밭을 한동안 헤매다가 신작로로 올라섰다. 대위가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더니 그대로 직진하면 된다고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낮과는 다르게 덥지는 않았다. 달은 없었지만 별들이 쏟아질 듯 총총했다. 그 별들을 보며 높은 산길을 넘고 넓은 들판을 지나고 부서진 다리를 건넜다.

길가에서 보이는 민가에는 마음껏 전깃불을 밝히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그들도 마음껏 전깃불을 켤 수 있는 것이 좋아서였을까? 밤이 꽤 깊은 시간이었는데 사람들은 잠도 자지 않고 모여 앉아있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아니 농촌이라면 사람들이 담배도 피우고 참외가 수박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석고상처럼 우두커니 앉아있기만 했다.

나는 지난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꾸벅거리며 졸았다. 자정이 훨씬 지났을 무렵 큰 철교 앞에 다다랐다. 철교와 멀지 않은 곳에 집들도 더러 보였다. 강태무가 “이게 대동강 철교다.”라고 하는 소리에 정신이 들면서 드디어 지옥의 종착역에 도착한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철교는 얼마나 심하게 폭격을 당했는지 굵은 와이어루프를 수도 없이 겹쳐서 겨우 현수교 모양으로 매달려있었다.

다리를 조심스럽게 건너서 동평양으로 짐작되는 거리로 들어섰다. 가로등을 급하게 가설했는지 어설프지만 그런대로 길을 어둡지 않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로등 주변만 희미하게 비친 탓인지 건물들이나 행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시가지 같은 곳을 벗어나 동쪽으로 3킬로미터쯤 더 달려 옥수수와 수수가 무수하게 자라고 있는 들판으로 나왔다. 들판을 가로질러 한참을 달리다가 옥수수 밭 한 가운데에서 차가 멈췄다.

오전 2시였다. 강태무의 안내로 옥수수 밭 가운데 서있는 초가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중좌 한 사람과 사병 7명, 20대 여자 한 명 그리고 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옥수수 밭 한가운데 서있는 허름한 초가삼간 고가(古家)의 안채는 마루도 없이 방 두 개에 부엌만 달랑 있고 열 평쯤 되는 마당 앞에 아래채가 있었다. 아래채의 한편은 헛간처럼 보였으나 다른 한 쪽은 그 용도가 무엇인지 빈 상태로 있었다. 지붕은 몇 년째 이엉 작업을 안했는지 지붕이 거의 다 썩어서 틈이 벌어져있어 비가 오면 다 샐 것 같았다.

나는 윗간에 들었다. 벽과 천정에는 풀냄새가 남아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노동신문, 인민일보 등의 신문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방의 한쪽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망가진 철제침대가 매트리스도 없이 놓여있었다. 마당에는 노린내를 풍기는 노래기 벌레들이 새까맣게 몰려다니기도 하고 더러는 방까지 기어들어오곤 했다.

강태무가 나에게 중좌를 소개하며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보살펴 줄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어두운 옥수수 밭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나는 그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여름철이었지만 방바닥은 얼음이라도 얼은 듯 차가웠지만 피곤에 지친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1953년 8월 4일 아침이었다. 날이 밝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지만 날은 어김없이 밝아온 것이다.

지난밤 소개받은 중령이 오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최 아무개이며 평안도 철산 태생이고 점잖은 집안 출신이라고 했다. 장군부관인 나의 계급이 자기들 인민군과 비교할 때 좌관 급이라서 나 역시 좌관으로 이곳에 와서 부관으로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대한 육군대령의 부관이 인민군 중좌라.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하는 마음이었다.

아랫방 여인과는 서로 ‘동무’, ‘군관님’ 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한 방에서 기거하는 것으로 보아 부부인 듯 했다. 그 여인이 부서진 작은 상에 감자나물 한 접시와 쌀밥 한 그릇을 올려가지고 방안에 들여놓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갔다.

뜰의 건너편 아래채에는 인민군 하사관 한 명과 병졸 6명이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지냈다. 보초를 서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곳에서부터 약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스피커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얼핏 들으니 “박헌영이가 반역을…….” 어쩌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오후에 최암 이라고 자칭하는 대좌가 왔다. 정치안전부 소속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이제 정통으로 염라대왕의 졸개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는 인사정도만 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 인물은 비교적 부드럽고 모난 곳이 없는 평범한 성격으로 보였고 공산주의자만 아니라면 친해질 수도 있는 자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 집에 기거하는 동안 괴로웠던 일은, 우물은 있으나 두레박이 없어 물을 길러 쓸 수 없었다는 것과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생리문제는 옥수수 밭에 들어가 해결했지만 양치질과 세수를 제대로 할 수 없어 갑갑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름철이라 몸에서 땀 냄새가 심했고 입안도 텁텁했지만 세숫물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발이나 면도를 며칠째 못하고 있으니 나의 몰골은 마치 산적과도 같았다.

나는 굳이 이발이나 면도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지옥에 떨어진 망자가 무슨 몸단장을 한단 말인가. 그날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말벗이라고는 네 살배기 꼬마가 전부였다. 꼬마도 나를 잘 따랐다. 나는 꼬마를 대할 때마다 고향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이 간절했다. 아비도 없이 세 남매가 제대로 먹고는 있는지 헐벗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제아무리 뿌리쳐보려고 해도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참고 또 참아야했다.

그 날도 밤은 오고 또 날이 밝았다. 최 중좌에게 약간 강한 어조로 나를 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곧 나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병사들을 데리고 가더니 물 한통을 짊어지고 와서 내 앞에 내려놓았다. 덕분에 이도 닦고 세수도 하고 몸도 닦을 수 있었다.

그 후부터는 매일 물을 한 통식 배급받았다. 식사도 쌀밥 한 그릇과 감자 요리로 하루에 세끼를 꼬박꼬박 가져다주었다. 감자만 계속 먹다보니 김치 특히 열무김치가 그리워졌다. 시중드는 여인에게 김치 좀 먹을 수 없느냐고 물으니 가만 있어보라며 눈을 깜박거렸다. 그날 저녁상에 열무를 소금에 절인 것이 올려졌다. 오랜만에 먹는 야채라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 두 가지가 있다면 그 하나가 그 열무김치였을 것이다.

나는 그 여인에게 줄 것이 없었고 다만 고맙다는 말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최 중좌에게 적십자에서 나온 수건을 구해오라고 했더니 다음날 수건과 의약품, 치약, 칫솔 등이 들어있는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상자에는 과자와 초콜릿, 껌도 들어있었다. 과자와 초콜릿을 꼬마에게 주었더니 아이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내가 필요한 휴지와 세수수건만 남기고 다른 것은 모두 그 여인에게 주었다. 여인은 처음에는 당황하는 눈치였으니 가져도 괜찮다고 하니 그제야 안심을 하며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의 열흘이 지나는 동안 아침마다 최암 대좌는 레코드판을 틀어놓은 듯 같은 내용으로 공산주의를 찬양하며 나를 세뇌시키려고 했다. 그의 세뇌공작이 끝나면 한가했지만 그 한가한 시간이 나에게는 무섭고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나를 이런 지옥에 떨어지게 한 인간들에 대한 증오감과 절망감이 자꾸 되살아나서였다.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8월 14일이었다. 다른 날과는 조금 달랐다. 아침나절에 최 대좌 대신 키가 작고 뚱뚱한 30대의 소장 한 녀석이 찾아왔다.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 그는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최 대좌와 마찬가지로 같은 내용으로 나를 세뇌시키려고 했다. 그의 연설에서 특이한 점은, ‘남조선 괴뢰정부’라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지만 가끔 우스갯말도 섞여 나와 그나마 지루함을 달래주었다. 나에 대한 임무를 마친 그는 돌아가면서 내일 다시 보자고 인사를 했다. 나는 내일 그를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후가 되어 최 대좌가 큰 봉투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왔다. 백지를 몇 장 꺼내더니 감상문을 쓰라고 했다. 나는 무슨 감상문을 쓰라는 거냐고 되물었다. 아무것이나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쓰라고 했다. 나는 김일성이 죽고 공산당이 없어졌으면 한다고 쓰고 싶었으나 나에게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우리 배달민족은 같은 민족으로 같은 핏줄인데도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하여 미국인과 소련인이 만든 무기를 형제의 가슴에 겨누고 있으며 총탄을 퍼부어 서로 죽이고 죽고 있으니 이런 일은 천지가 개벽을 한다고 해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시 빨리 가졌던 무기를 동해, 서해, 남해 바다 깊이 던져버리고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생업을 발전시키며 평화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감상문을 써냈다.

나의 감상문을 받아든 최 대좌는 가져온 보따리를 풀더니 청색 노동복에 레닌모자와 검정색 운동화를 꺼내주며 내일은 이 옷을 입으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그 청색 옷은 그들 세계에서 소위 문관들이 입는 제복이라고 하며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이어서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이가 또 보따리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이발사였다. 나는 한사코 이발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으나 최 대좌와 내일 어디를 가야 하니 이발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못이기는 척 하고 이발을 하도록 했다. 이발기계가 낡았는지 몹시도 아팠다.

그날 초저녁에 서쪽 지평선에서 무수한 조명탄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최 대좌 말에 의하면 8.15경축 전야제 행사였다. 공산사회에도 경축이 있고 전야제라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27. 염라대왕과 그 졸개들의 무도회 8월 15일 아침이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일찍 아침식사를 마치고 청색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레닌 모자를 머리에 얹고 검정색 운동화의 뒤를 눌러 신고 큰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련제 검정색 소형트럭에 올라탔다. 차에 타고 나서야 최 중좌는 오늘 8.15기념행사에 참석한다고 귀띔해주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자연은 태연하게 순환되어 들판의 농작물들이 누런 빛깔로 익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변인가. 논두렁 밭두렁에 군데군데 움막 같은 것이 서있고 집집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낮은 언덕을 넘어서니 폐허가 된 평양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모였는지 해방 전에 지어두었던 것처럼 보이는 옷을 걸치고 남녀, 청년 중년 할 것 없이 서성거리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물이 흐르듯 아니 장례행렬과도 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끌려가듯 느린 속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주변으로는 인민군 하사관들 약 사오십 명이 간격을 유지하고 서있었다. 나는 자동차로는 더 이상 진입이 어려워 시간과 장소를 약속하고 차를 돌려보냈다. 나는 최 중좌가 안내하는 대로 무리의 물결을 따라 함께 걸어갔다. 마침 인민군 보초의 교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대장면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초들은 작업복에 따발총을 거꾸로 메고 검정색 가죽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들은 보초를 교대하면서 가죽장화와 헤진 운동화를 서로 바꾸어 신었다. 길가의 전봇대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새것으로 보이는 스피커가 매달려있었고 무슨 소리인지 왕왕거렸다. 사람의 물결에 밀리다가 어디쯤인지 더 이상 사람이 없는 언덕 위로 올라섰다.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층집이 절반은 부서진 상태로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 허름한 건물에는 나와 같은 청색 옷차림을 한 사람들 한 무리가 있었다.나는 무리를 비집고 앞으로 나가서 창문도 없는 창가에 섰다. 창밖 건너편으로 커다란 문루가 덩그러니 서있었다. 나는 며칠 전 새벽에 그 앞을 지나왔다. 그것이 대동문 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 날은 어두워서 미처 못 보았겠지만 그 부근에 화신 백화점 등 건물들이 있어야 맞는다. 그런데 그 대동문 뒤쪽으로 건물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수만 명 평쯤 되어 보이는 광장이 펼쳐져있고 그 광장에는 2만 명쯤 되어 보이는 인민군부대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있었다. 그 뒤편으로는 사용이 가능한지 알 수 없는 기계화 부대, 포 부대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 멀지않은 곳 왼편으로는 조금 높은 언덕이 보이고 그 위에 처량한 모습의 정자 하나가 보였다. 그곳은 모란봉이고 정자는 을밀대라고 짐작되었다. 내가 서있던 언덕에서 아래로 100미터쯤 더 떨어진 곳에 사열대가 보였다. 사열대는 제법 큼직하게 만들어졌지만 판자를 얼기설기 연결해 조악해보였다. 얼마 후 장엄한(?) 군악대 소리와 함께 미끈한 가지색 승용차가 사열대 앞으로 나타났다. 어디서인지 ‘우-’ 하는 소리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메아리치듯 흘러갔다. 아마 염라대왕이 나타난 것이리라. 뒤가 가려진 사열대는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으나 전체적인 광경은 잘 보였다. 늘어서있는 졸개들의 대오(隊伍)는 놀라울 정도로 잘 정돈되어있었고 군악대도 세 팀쯤 되어보였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전쟁 중 거의 모두가 목이 졸렸다가 원수 중공군 놈들 덕분에 겨우 숨통을 트인 이 졸개들이 어느 사이에 이토록 훈련을 받은 것일까? 휴전이 되고 약 1개월 후의 상황이었다. 그 사이 졸개들을 얼마나 닦달했으면 이처럼 로봇과 같이 길들여졌을까? 멀리서 보이는 광경은 마치 바둑판같았다. 잠시 후 승용차 서너 대가 대열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아마도 괴수와 그 졸개들의 우두머리인 간부졸개들일 것이다. 염라대왕과 그 졸개들의 광란의 무도회는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열이 끝나고 두목이 사열대로 올라섰다. 졸개들은 가장 좌측에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제에 분열을 하려는 듯싶었다. 잠시 후 그 선두가 괴수 앞에 나타났다가 지나가고 그 뒤로 수도 없이 지나가고 또 몰려오고 하는 것이 반복되었다. 대오 정연하고 발도 줄도 그리 잘 맞을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감탄을 하기 보다는 ‘저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을 받았으면 저런 경지에 이를까.’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전율마저 느껴졌다. 저들은 전쟁 전에 지금 이상의 훈련을 강행했을 것이고 또 앞으로도 그리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소위 보병졸개들이 모두 지나가고 기갑부대랍시고 탱크 몇 대와 장갑차 그리고 괴상한 모양의 차량이 몇 대, 구식 야포와 곡사포가 지나갔다. 그리고 트럭부대가 그 뒤를 이었다. 그때 공중에는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 한 대와 경비행기 한 대가 상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들의 공군이 보유한 전부였으리라. 군대가 모두 지나간 뒤로 아침나절 이리로 올 때 만났던 민간인들 행렬이 이어졌는데 그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먼 곳에서부터 강제 동원되어 왔을 것이다. 하나같이 풀이 죽어 있었고 마치 장례행렬 같은 분위기였다. 행렬이 다 지나가려면 앞으로도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그때 괴수 김일성이 사열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 뒤로 졸개우두머리 몇 놈과 사복차림의 소련인 두 명이 따라나섰다. 김일성은 해방직후 만주에서 고향으로 넘어오는 길에 청진에서 얼핏 보았을 때보다 살이 좀 오른듯했다. 그간 양민을 얼마나 착취했으면 살이 저리 토실토실 올랐을까 생각하니 또 한 번 분통이 터졌다. 괴수들이 사라지자 최 중좌가 “우리도 돌아가자.”고 했다. 시계를 보니 두시가 좀 지나 있었다. 막 돌아서서 나오는 순간 내무성 정복을 입은 자와 마주쳤다. 김웅 이라는 친구였다. 나와 그와의 관계는 각별했었다. 내가 간도성에 근무할 때 그는 회령에서 기계상을 운영하며 처가에 더부살이를 하던 평양사람이었다. 성격도 원만하고 유머감각도 있는데다 나이도 비슷해 친하게 지냈었고 가끔 거래도 했었다. 더욱이 해방 후 나의 귀향길에서도 물심양면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바로 그가 내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있는 그의 사상이나 생각들을 알 수 없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만났다는 자체는 비할 데 없이 반갑기만 했다. 우리는 평상시처럼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가 평양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이유가 없으나 내가 평양에 있다는 사실을 그가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안내하는 최 중좌의 눈도 있어 김웅과 더 이상의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헤어져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쉽기만 하다.약속한 곳으로 갔으나 자동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인파에 밀려 아직 들어오지 못한 듯 했다. 배가 몹시 고팠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곳 평양이라는 곳에는 건물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있다고 해도 반파가 되었거나 혹은 거의 폐허가 된 상태였다. 우군의 공중폭격이 이토록 무차별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최 중좌의 설명에 따르면 미군의 폭격은 관공서나 대형건물, 군대시설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었고 기타 민가는 북한군이 자진해서 철거하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철거한 건물에서 나온 목재를 논두렁이나 밭두렁으로 옮겨서 그곳에 움막을 지었다는 것이다. 최 중좌 역시 배가 고팠던지 ‘냉면’이라고 써진 반 토막만 남은 기와집으로 들어가 냉면을 청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한 시간 이상이나 기다려서 겨우 소금물에 냉면사리만 들어있는 괴상한 냉면을 한 그릇 먹을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평양냉면이 어디로 자취를 감추었단 말인가? 그나마도 다 먹지 못한 채 뒷사람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밖으로 나와 보니 젊은 부녀자들이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길가 풀숲에 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먼 곳에서 강제 동원되어 밤잠도 못자고 끌려와 지칠 대로 지친듯했다. 겨우 시가지를 빠져나왔으나 자동차를 만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걸어가기로 하고 그곳을 떠났다. 중간쯤 오니 하얀 모래에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다다랐다. 최중좌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얼마 만에 만난 물인지 몰랐다. 밀림 속에서 목욕을 한 이후로 처음이었다.나와 최 중좌는 숙소로 돌아왔다. 집주인 여인이 커다란 바구니에 파와 가지를 비롯해 지금까지 구경하지 못했던 닭도 한 마리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집 안에 들어서니 그 땅딸이 경상도 소장 녀석과 최 대좌가 방에 앉아있다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무슨 일로 두 놈이나 한꺼번에 와있는지 의아해하며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능글맞은 억양으로 피곤하겠다느니 구경 잘 했느냐며 지껄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기분을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오늘의 행사는 아마도 세계적일 것이다.”라고 허풍을 떨며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고 “먼 발치에서나마 수령님의 얼굴을 본 것이 내 생애 영광”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은 내게 세뇌적인 내용의 말은 하지 않고 그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또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라는 이상한 말들로 작별인사와도 같은 분위기의 말들만 연거푸 늘어놓았다. 얼마 후 커다란 밥상이 들어왔다. 채소에 닭고기를 넣어 볶은 것과 열무김치, 닭 뼈를 넣고 끓인 감잣국 등 진수성찬의 밥상이었다. 최 중좌가 술병을 하나 들고 방으로 막 들어섰을 때 마당으로 노인이 한 명 들어섰다. 얼굴이 거멓게 그을리고 화등잔처럼 큰 눈을 가진 한 남자가 회색양복에 같은 색 레닌 모자를 쓰고 마당에서부터 방으로 거의 기어오다시피 들어섰다. 방안의 친구들 모두 일어서서 그를 맞이했다. 자세히 보니 우리 육군 총사령관을 지낸바있고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주던 송호 즉 송호성 장군의 변한 모습이었다. 나는 반가워서인지 슬퍼서인지 모르지만 왈칵 치미는 눈물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부여잡아 자리에 앉히고 인사를 했다. 그 역시 나를 금방 알아보고 그 부리부리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은 참으로 이상한 날이었다. ‘이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을 터인데 어인일로 이렇게 파격적인 대접을 하는가?’ 불안하기도 했다. 송호 장군과 함께 불 끄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맑은 술로 건배를 들었다. 소장 녀석이 술잔을 권하며 “동무, 잘 가시오. 동무는 오늘 밤차로 이남에 송환되오.”라고 했다. 그 소리가 저 깊고 깊은 지옥의 바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 꿈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어찌나 세게 꼬집었는지 살점이 얼얼한 것이 분명 꿈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술을 돌리라고 했으나 나는 사양했다. 그러자 송 장군은 “이놈은 남에서도 얌전하기만 했지 술이나 계집은 멀리했네.”라며 나에 대해 잘 아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소장 녀석이 “어쩐지 품위가 있고 점잖아 보인다.”며 대꾸했다. 공산 졸개들로부터 칭찬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토주나마 알코올이 들었는지 그들은 약간 취해온 듯 했고 송 장군은 그들이 듣기 거북한 말들과 반미감정이 섞인 말을 쏘아댔다. 그러자 최 중좌가 “영감, 심히 취하셨다.”며 밖에 있는 졸병에게 자동차 있는 데까지 모셔가라고 했다. 나는 마당으로 나와 그를 배웅하며 영원한 작별을 했다. 그 당시 그는 항미구국민주동맹군 사령관이라는 직함으로 국군전쟁포로들의 우두머리 자리에 있었다. 술병이 완전히 비워지자 그들은 돌아갔다. 밤이 길었다. 밖에 누군가가 와서 자동차가 왔다고 전했다. 나는 나의 군복과 군화를 갈아입고 진남색 옷을 싸가지고 나섰다. 그동안 내 부관 역을 충실히 해낸 최 중좌에게 주려고 했으나 그는 한사코 거절해서 파카 만년필을 억지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대단한 보물이나 생긴 것처럼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어두운 밤길을 달려 평양역에 도착했으나 내가 타려는 전차는 없다고 했다. 서평양역으로 갔으나 역시 예정에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이름 모를 역으로 갔으나 역시 허사였다. 헛걸음을 하고 새벽녘이 되어 옥수수 밭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의 불안한 마음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고등술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어 이리저리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날이 밝았어도 답답한 마음은 이를 데 없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최 중좌를 앞세우고 어제 갔던 시냇가로 가서 비누로 말끔히 목욕을 했다. 석양에서야 돌아와 다시 길을 떠났다. 평양역에 가보니 북쪽으로 1킬로쯤 가면 열차가 도착해있다고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최 중좌와 둘이서 어둠 속의 철로를 달렸다. 그곳에 가니 과연 열차가 서있고 화차 안에는 우리 국군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그들은 애국가와 군가, 유행가까지 부르며 자못 흥분상태로 들떠있었다. 누군가가 “이놈의 새끼들아, 이런 걸 먹으라고 가져왔느냐?”며 도시락 같은 것을 화차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나는 열차의 끝에 있는 화차까지 더듬거리며 갔다. 그곳에는 열차를 호송하는 인민군 장교와 사병들이 타고 있었다. 최 중좌와 한 장교가 나의 신병을 인수인계 하는 듯 했다. 장교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올라오라며 나를 기차로 끌어올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리고 적과 적의 관계였지만 최 중좌와 헤어지는 것이 사뭇 아쉬웠다. 나는 “최 중좌, 신세 많이 졌소. 잘 계시고 다음에는 서울에서 만납시다.”라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도 역시 내 손을 잡으며 잘 가고 서울에서 만나자며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서로가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고 같은 말을 했지만 각자가 그 말에 담은 참뜻 역시 같은 것이었을까? 이젠 무력으로는 통일이 안 되고 평화통일 밖에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과연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까 지금도 궁금한 생각 중 하나다. 그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졸개 하사가 화차 한 구석에 깔아놓은 다다미에서 잠을 청하라고 안내하며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새벽 2시까지 길을 헤매고 겨우 송환열차에 오르고 나니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들었다. 가져다준 도시락을 열어보니 고급스러웠다. 평양에서 실었는지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좀 전에 우리 사병이 내동댕이친 것도 이것과 같은 것일 텐데 왜 그랬을까 궁금했다. 도시락은 다음날 아침식사용까지 두 개씩 주어졌다. 그렇다면 그 병사는 적어도 내일 점심이나 저녁까지는 굶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가 측은해지기까지 했다. 이런 곳에서 ‘만용’이 통할 리 없다.

기차는 느릿느릿 야음을 헤치며 남으로 달렸다. 나는 어느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옥로 8가>
7월 15일 염라대왕의 졸개들에게 붙잡힌 이후 처음으로 안락하고 깊은 잠을 잔 듯 했다.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기차는 여전히 느림보였다. 지금 달리고 있는 철로가 분명 경의선일 테고 두 가닥의 복선일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서 만주 신경까지는 특급열차가 운행되던 특급철로 일 것이다. 그런데 밤도 아닌 밝은 대낮에 이렇게까지 느리게 달리는 것인가? 나의 궁금증은 쉽게 풀렸다.

철도 침목은 완전히 썩어버린 상태고 철교는 성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철교구간 전체적으로 폭격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앞에서도 썼듯이 이곳 철도 역시 수없이 대형폭탄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폭격을 당하면 메우고 복선이던 옆 철길 레일을 뜯어다 다른 쪽에 깐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3년 동안 그들은 임시방편으로 보수만 했기 때문에 철로가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완전히 썩어버린 침목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고 철교 역시 와이어로프로 겨우 매달려있는 상태에 무너진 교각은 침목을 쌓아올려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가져왔는지 새침목이 철로 변에 산처럼 쌓여있고 일꾼들이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열차가 어느 역인가에 진입하는 순간 덜커덩 소리와 함께 급정차를 했다. 밖을 보니 열차 중간쯤으로 역무원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화차 한 칸이 탈선했다고 아우성이었다. 마침 그곳에는 침목을 교체하는 작업 중이었다. 나는 생리도 해결할 겸 화차에서 뛰어내렸다. 역무원과 작업반장 같은 자가 큰소리로 다투자 열차 호송군관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눈 채 속히 끌어올리라고 호통만 치고 있었다. 과거에는 하룻밤도 걸리지 않을 거리를 자칫하면 이틀 이상이나 걸릴 상황이 될듯하니 호송군관으로서도 답답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니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지 서로 다투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역시 공산주의에도 책임전가 하는 버릇은 있었다. 나는 호송군관을 불러 지시 아닌 지시를 했다. “탈선한 화차와 그 바로 앞 화차를 떼어놓고 기관차를 뒤로 후진시켜 탈선한 화차만 남기고 다음 화차를 끌고 가서 앞에 있는 화차와 연결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그 대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기관차에 오르더니 나의 제안대로 실행했다. 탈선한 화차에 타고 있던 우리 군인들을 다른 차에 분산시켜 수용하고 열차는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얼마 후 사리원역에 도착했다. 연료와 물을 보충하고 다시 출발했으나 한나절이 지나도 우리가 탄 열차 이외에 다른 열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철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군용 자동차가 군데군데 집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석양이 다 되어서야 겨우 개성 역에 도착은 했으나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크게 아쉬운 것이 남겨졌다. 지금 내가 지나온 철로는 적의 군수품을 실어 나르는 보급로가 틀림없었다. 그 중요한 보급혈관의 기능이 마비가 될 직전에 처해있는데 휴전이 된 것이다. 조금만 더 전쟁을 끌었더라면 이 철도가 완전히 마비되었을 것이고 우군에 전세가 유리했을 것이다. 또한 휴전도 더 유리한 조건으로 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휴전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아해야 하는데 무척 대조적인 소회였다.

사병들은 여러 대의 트럭에 나뉘어 실려 어디로인가를 향해 가버렸고 나는 역장실을 나와 역전 광장 한 구석에 설치된 소형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인민군 하사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도착한 열차에서 하사관 한 놈이 내렸다. 그는 나를 미처 보지 못하고 나와 함께 있던 하사관에게 “그 부 사단장인지 하는 자가 어디 있어?”라며 떠들어댔다. 그러자 다른 한 놈이 손가락을 입에 대며 자기 뒤를 가리켰다. 떠들던 하사관은 나를 보더니 기겁을 하며 깍듯이 경례를 하며 모시러 왔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

지프차를 타고 불과 300미터 쯤 떨어진 큰길가에 있는 일본인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여관 같은 건물 앞에 섰다. 건물 안에서 깨끗하게 차려입은 하사관 네 명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나의 앞에 일렬로 서서 깍듯이 경례를 하고 “지금부터 저희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시중을 들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나를 2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큰길가 쪽으로 자리한 방은 제법 넓었다. 그곳 역시 금방 도배를 마쳤는지 벽에 붙은 신문지에서 잉크와 풀냄새가 풍겼다.

한쪽에는 나름 두툼해 보이는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가 놓여있었고 탁자 위에는 소련 주간지와 사진, 화보들이 여러 권 놓여있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역 앞 큰길로 군용트럭과 중립국 감시군의 차량 등이 깃발을 날리며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나는 상의를 벗고 내려가 세수를 하고 올라오니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조금은 정신이 드는 듯 했다. 잠시 후 밥상이 들어왔다. 제법 여러 가지의 반찬과 쌀밥이 차려져있었으나 식욕이 나지 않았다.

밤이 깊은 듯 했지만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과연 현실인가? 자꾸 의심이 들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확인도 해보았다. 어김없는 현실이었다. 분명히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대로 행운이 아니겠는가. 내가 아는 고급장교 K와 P는 어찌 되었을까? 나처럼 돌아가고 있는 중인가?

나는 내일이면 남쪽으로 돌아간다. 대한민국에서는 나를 어떻게 맞이할까? 일본식으로 아니면 미국식으로 대할 것인가? 아버님은 건강하신 걸까? 혹은 화병이라도 나서 돌아가신 건 아닐까? 아버님은 성질이 급하신 편이지만 사리가 밝고 침착하시니 그럴 일은 없으리라. 또 아이들은 아비 없이 어떻게 지냈을까? 끼니는 굶고 있지 않을까? 이러저러한 생각에 나는 감았던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나를 보살펴 주시던 상사들의 얼굴도 떠오르고 무능하기 짝이 없던 사단장 C와 기회주의자였던 예비연대장 Y도 생각났다. 어떻게들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을 지새운 것 같다. 창을 통해 날이 밝아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머리가 무겁고 눈이 따가웠다. 벽에 걸린 거울을 보니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무심코 밖을 보니 중공군을 태운 수송부대가 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반면 인민군 부대는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게 보였다. 장비들은 별 것 없었다. 자동소화기에 박격포 등 보병무기들을 가지고 갔다. 그때부터 나는 남으로 가는 차량의 수를 머릿속으로 세었다. 어디에 쓰려는 지는 나도 몰랐다.

잠시 후 졸개 한 명이 아침식사를 가져왔다. 몇 시에 출발하는지 알아오라고 지시했더니 한참 후에야 반장이라고 하는 젊은이가 올라와 준비가 덜되었다며 내일 일찍 떠난다고 전해주었다. 그렇다. 서두를 것 없지 않은가?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고 굳이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끝내 아쉬운 것은, 다 승리한 전쟁을 이대로 그만 둔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포로가 되었었고, 이제는 휴전이 되었다. 그래서 남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내가, 휴전을 반겨야 할 내가 어인 일로 아쉬운 마음을 갖는 것일까?

공산군의 남침으로 우리는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당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지옥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는 휴전이 반갑지 않은 것인가? 공산당들이 긴박한 실정에 처해있는 사실을 우리의 높은 분들이 나 정도만 알았더라도 휴전은 늦춰졌을 것이고 우리는 ‘치욕의 휴전’이 아닌 ‘명예스러운 승리’로 전쟁을 마무리 했을 것이다.

초음속의 속도로 수천 미터 상공을 날아다니는 정찰기가 무슨 재주로 산 협곡에 위장된 탄약고를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산기슭 동굴 속에 교묘하게 위장된 거포를 무슨 수로 찾아낼 수 있었겠는가? 놀랄 만치 잘 위장된 대부대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 고위층은 어찌하여 지상으로 정찰대를 투입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는가? 게릴라를 보내어 후방으로 침투작전을 하지 못했는가? 지상에서 수색작전을 펼쳤더라면 은폐된 탄약고도, 거포의 동굴도 모조리 발견해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소극적인 윗분들은 다 잡아놓은 괴물을 그대로 풀어주었다. 그 괴물은 이제 커질 대로 커져서 우리 앞에서 무한한 위협을 주고 있는 것이다. 휴전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풀려나오지도 못했을 것이고 우리 포로들 모두 지독한 고생을 하며 생을 북에서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이 반갑지 않은 것은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쉬움을 간직한 채 또 한 밤이 지났다. 반장의 지시로 입고 있던 작업복을 벗고 진남색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후 지프차가 도착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간 날부터 오늘까지 37일이 지났다. 1953년 8월 21일 아침이었다.

집 앞 큰길에는 수십 대의 트럭에 우리 병사들이 진남색작업복 차림으로 가득 실려 있었다. 선두에 선 지프차에 내가 오르자 자동차 대열이 출발했다. 한참 후에 판문점에 도착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출구로 걸어갔다. 우리 측 한미 장교들과 위생병들 그리고 수많은 구급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명되는 순서대로 우리군 병사들이 빠져나갔다. 급기야 나의 이름이 호명되었으나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말없이 앞으로 나서니 미군 장교가 서투른 한국말로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심장을 가리켰다. ‘마음이 아프다.’는 뜻이었다.

철도역 개찰구와 비슷한 곳을 빠져나왔다. 나는 돌아서서 진남색 작업복과 신발, 모자 그리고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조그만 주머니까지 훌훌 벗어서 건너편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내가 입고 간 내의 차림으로 자동차에 올랐다. 아카시아 나무의 잎사귀가 우거진 한적한 길을 따라 자동차는 남쪽으로 달려갔다. 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환희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쯤인가 ‘귀환용사 환영’이라고 쓰인 깃발이 휘날리는 곳에 도착하니 수백 명의 군중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귀환용사들의 부모형제처자들이었다. 나는 맨발에 팬티 차림으로 차에서 내렸다. 앞쪽으로 외신기자들 사오십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중에는 여자 기자도 많이 있었다.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서있으니 안면이 있는 장교가 나의 아내를 데리고 다가왔다. 아내는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왔는지 나를 보더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색이었다.

외국기자들은 우리 부부가 감격적으로 상봉하는 장면을 크게 기대하면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기다렸다. 나는 아내가 안고 있던 둘째딸을 받아 안고 안면 있는 장교에게 나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최석 소장(교환귀환자인수본부장)이 달려왔다. 나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외국인 기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의 아내는 본체만체하고 아기만 안고 오히려 남남인 사람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아내를 끌어안고 입술을 부비는 장면을 그들은 기대했을 것이다.

최석 장군이 “임 대령, 답례를 해.”하고 부추기는 바람에 앞을 보니 의장대와 군악대가 나를 향해 경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당황스러웠으나 겨우 손을 들어 37일 만에 거수경례를 했다. 팬티바람으로 의장대를 대한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나를 제외하고는 전무후무 할 것이다. 이로서 나의 지옥여행이 끝난 듯 했다. 지옥이여 안녕 하라. 그러나 앞으로 지옥로 9가가 계속 이어질지 극락으로의 길이 시작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느 작은 건물로 안내되어 피복도 새로 받고 융숭한 점심식사도 대접 받았다. 사단장 C장군이 찾아왔다. 그는 매우 미안해했다. 자기가 당할 고생을 대신해준 나에게 미안해하는 것이리라. 잠시 후 나는 대구 육본으로 후송되었다. 대구 비행장에 도착하니 참모차장 이 장군과 육본 일반참모들이 영접을 나와 있었다. 제법 깨끗한 여관에 숙소가 정해졌다. 저녁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정보계통의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나는 체념인지 안심인지 모를 허탈한 심정을 혼자서 달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고위층 등 요로를 심방하고 친우들도 방문하느라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2개월간의 휴가가 허가되었다. 나는 우선 서울로 돌아왔다.

28. 남경사 사령관

나의 실종사건은 일단 일단락 지어졌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 된 것이다. 포로로 지내는 동안 육체적 고통은 없었다고 해도 참기 어려운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었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거두지 못하고 적에게 굴복하여 유지한 목숨인데 욕되게 살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70살이 넘는 이 순간까지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살아오질 못한 듯하다. 죽으려고 결심만 했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지 못한 채 덤으로 사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우선 처자가 살고 있는 서울 명륜동으로 갔다. 오랜만에 다리를 쭉 펴고 잠 잘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아마도 지옥 길은 끝나지 않은 듯 했다. 내가 걸어온 37일간의 지옥 길은 상상 외로 순탄한 편이었다. 정신적인 협박이나 고통을 당한 일도 없었고 무엇을 실토하라고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었다. 내 몸의 털끝 하나도 다친 일이 없었고 첫 날을 제외하고는 장거리를 도보로 걸은 일도 없었다.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지냈고 오히려 그들의 여러 가지 상황을 보고 들었다. 내가 보고 들은 것들이 우리 국가나 군부에 유리하게 참고는 못되었을 것이나 어쨌든 나는 북한 땅을 보고 왔다.

특별히 막심한 고생 없이 지옥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포로가 되었었다’는 그 사실 하나가 나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나는 가족과의 해후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임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새로 부임한 곳은 광주 교육총감부로 직책은 부총감이었다. 있으나 마나 한 잉여인간을 위한 한직이었다. 그나마도 고마웠다. ‘놀고 있으면 뭘 하겠나.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다시 기회를 얻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동료나 후배들이 나를 백안시 하는 것만 같았다. 특무대에서는 나의 행동을 감시하는 듯 했고 상사나 친지에게 보내는 단순한 안부서신도 검열을 하는 듯 했다. 나는 상대방에게 피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신도 점차 보내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멀어졌다. 세상이 무정했다. 전에는 나를 무척이나 아껴주던 상사들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총감이라는 자 K장군은 체면치레에만 급급한 자로 생색을 낼 수 있는 일은 자기가 하고 입장이 곤란해질 일은 나에게 전가했다. 그 때문에 나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순수해야할 군대에서 이런 일들이 성행되고 있었다. 휴전 후 분위기는 아첨과 아부를 하는 자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남들은 일선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전쟁을 하고 있을 때 다른 이들은 부정부패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군용차를 이용해 후생사업 한 것으로 부패한 상사의 비위나 맞추던 자들이 버젓이 별을 달고 나타나는 일도 흔했다. 영어 좀 한답시고 고문관을 배경삼아 별을 따기도 하고 돈과 미인계까지 동원해 진급을 하는 온갖 추잡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반면 나는 사생활까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소정의 월급 외에는 수입이 없었다. 가족과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장교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했는데 그곳에서초차도 눈칫밥이었다. 남들은 휴일이면 명승지로 여행도 가는데 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런 것들이 지옥의 연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던 중 전보가 한 장 날아왔다.

육본에서 날아온 명령은 남경사 사령관이라는 엄청난 직책이었으나 그 자리 역시 한직에 속했다. 휴전 당시 인민군 패잔병들이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숨어들어갔다. 초반에는 그 숫자가 약 2만 명에 달했는데 그동안 3성 장군들이 군단병력과 경찰병력 1개 사단으로 토벌을 하고 약 1천 명 정도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잔여 숫자는 정예부대이자 공산주의 골수분자들이라 그들을 완전하게 소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리 병력도 대부분이 철수를 하고 육군병력 1개 사단과 경찰이 약 1개 사단 정도에 불과했다.

대령인 나로서는 과분한 자리였다. 육본에 신고를 하기 위해 가서 총장인 정일권 장군을 만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자리가 공석이 되자 장군들이 7명이나 지원을 했다고 했다. 정 장군은 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나를 남경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고 말했다. “남경사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공비의 잔당을 포착 섬멸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고, 그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은 전 군을 통틀어 임익순 대령 외에는 없다.”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그의 말은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다른 자들은 내가 혹시 포로가 되어 공산주의에 세뇌라도 되지 않았나 의심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게다가 나를 등한시하기까지 하는 마당에 정 장군은 나에게 과분한 직책을 부여한 것이다. 나는 그분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분골쇄신하여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1954년 4월 28일 남경사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전임자 Y장군과 임무교대를 한 후 적정을 검토했다. 공비들은 지리산과 덕유산, 대문산 등 넓은 지역에 소규모로 분포되어 수시로 출몰했다. 그들은 심산유곡에 거처를 두지 않고 양민마을 가까운 지역에 굴을 파고 숨어있거나 어떤 경우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점에 잠복하고 있기도 했다. 철교나 터널, 교량 등의 주요시설을 공격하려고 하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지역에까지 산재해있었다. 그러나 생필품 보급이나 상호간 연락망의 결함, 의료문제 등의 약점도 허다했다. 결정적인 사실은 그들이 낮에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면의 공비섬멸에 대처했다. 먼저 경찰병력을 저지대 인가에 근접하도록 배치해 공비들의 보급투쟁을 봉쇄했다. 한편 앞서 지리산 토벌대와 같이 3인조 또는 5인조로 소규모의 수색대를 편성해 광범위한 지역에 정보수색망을 펼쳐 그들의 통로를 차단했다. 마을장이 서는 곳에는 정보원을 배치해 공비들의 보급품조달을 감시했다. 이렇게 공비들의 활동을 봉쇄하고 선무공작에도 주력했다.

항공기로 전단지를 뿌리고 그들이 있을 만한 곳에도 침투해 전단지를 배부했다. 그들은 골수분자이자 맹목적 추종자들이었다. 귀순하고 싶어도 나가면 무조건 죽는다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고 싶어도 죽음이 무서워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한편 우리 측은 고아원 아이들 가운데 십대소년들을 침투시켰다. 중년보모의 인솔 하에 약 30명가량을 산골 개활지 개간이라는 명분으로 산골에 들어가서 가건물을 짓고 거주하며 밭도 갈고 논도 개간하게 했다. 농지 개간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원래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공비 열 여명이 나타났다. 고아들이 먹을 식량을 약탈해 가며 건어물 등 부식품까지 모두 가져갔다. 그 건어물이 함정이었다. 건어물에 설사약을 미리 투입해두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공비들은 맛있다고 먹었을 것이고 설사가 났을 것이다. 공비들 가운데 모 사범학교 출신의 배운 사람이 끼어있었는데 “고아들의 식량을 약탈해다 먹어 벌을 받는 것이니 귀순 권고문을 들고 내려가자.”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들이 내려왔을 때 고아원 보모는 미리 교육 받은 대로 전력을 다해 선무공작을 벌이고 귀순증을 나누어 주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공작이었다.

설사사건도 있었고 무리들 중 배운 자도 있어서였는지 그들은 다음날 고아원 보모를 통해서 부근에 잠복하고 있던 우리 수색대에 귀순했다. 귀순한 자들은 전원 석방되어 연고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후에 다들 잘 살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우리의 작전은 계속됐다. 날마다 경비행기로 상공에서 정찰을 하고 소부대 수색대가 산등과 골짜기의 통로를 거의 차단하고 있으니 그들은 활동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위치를 포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 여름이라 나무가 무성한 나머지 옆에서 지나간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여름철은 견제공격으로 끝내고 낙엽이 지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본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산꼭대기나 골짜기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있고 기온은 차가웠다. 우리 부대원들은 극심한 고생을 해야 했지만 잘 먹고 따뜻하게 입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반면 공비들은 추위에 먹지도 못하고 헐벗은 생활을 해야 했다. 승부는 뻔한 일이었다.

겨울철의 산등과 골자기에 쌓인 눈은 공비의 발자국을 남기게 해 우리에게 좋은 단서를 제공했다. 고생도 많았지만 다음해 3월말 생사불명의 공비 세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살 또는 생포로 공비토벌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내가 그곳에 부임했을 때 신문기자회견이 있었다. “그 지역에서 언제쯤이나 공비를 한 놈도 없이 토벌할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었다. 나는 거침없이 “4월부터 사람들이 배낭을 짊어지고 지리산에 등산할 수 있게 하겠다.”고 대답했었다. 어느 신문에서는 나의 대답을 야유했고 어느 기자는 너무 장담하는 것 아니냐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기도 했다. 공비를 토벌하는 동안 우리 측은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었고 약간의 식량을 약탈당했을 뿐이었다. 공비가 토벌됐다고 하자 신문기자들이 다시 몰려왔다. 나의 전과를 찬양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기 어렵다는 이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 그 지역 내에서 단 한 명의 공비도 출몰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전과를 올린 나였지만 그 시대의 흐름이 나를 다시 지옥 길로 내몰았다. 그 전 겨울이었다. 육본의 모 장군에게서 장작을 한 트럭 보내라는 전갈이 왔다. 장작대금은 보내지도 않고 거저 달라는 뜻이었다. 돈도 없이 장작을 살수도 없었고 부대차량을 대구까지 보낼 수도 없었다. 나는 그의 요구를 그대로 묵살했다. 그런데 그 일이 화근이 되었다. 3월 말로 공비토벌 작전이 끝나고 각 부대들은 부대정비에 들어갔다. 일 년 동안 쉴 새 없이 작전만 하느라 부족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 육본에서 종합검열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실감했다. 장작을 보내달라던 자가 하필이면 단장으로 왔다. 그는 앙갚음이라도 하듯 검열의 결과에서 혹평을 했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종착역이 어디인지 하늘을 보며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일 년여에 걸쳐 만신창이가 되어가며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지만 참혹하리만치 혹평을 한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보다 못한 고문관은 불같이 화를 냈다. 하와이 원주민 출신인 ‘기아라’라는 미군중령이었다. 그는 즉시 그 부당함을 자기의 상관에게 보고하고 그의 상관은 이어 정일권 총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임무가 끝난 부대는 해산했다. 약 1개월에 걸쳐 부대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 정일권 총장에게 신고했다. 검열결과가 불량해서 죄송하고 그 책임을 지겠다고 했더니 그는 오히려 무슨 말이냐며 나무랐다. 곧이어 비서를 부르더니 지리산의 영웅에게 훈장을 상신하라고 지시하고 내게는 예비사단을 한곳 맡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동안 일만 하느라 공부할 기회를 여러 번 놓쳐 아쉽다고 했더니 그러면 육군대학에 가서 좀 쉬며 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번 진급에서 누락된 것은 정보참모가 다음으로 미루라고 하는 바람에 그리 되었다면 미안해했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공비토벌작전을 펼쳤었다. 지리산 공비토벌과 영덕지구 작전에서 체험하고 수행한 작전들을 요약 정리해 <공비토벌의 관견>이라는 제목으로 육본교육월보에 실었다. 제법 평이 좋았고 청년장교들에게서 문의도 들어오고 육사에서 강의도 했다. 진실을 진실대로 말하면 된다는 신념을 굳히게 된 동기도 되었다.

남경사에서의 임무를 끝내고 달라진 것은 그동안 나의 주변을 감돌던 감시의 눈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지리산 지구의 공산골수분자들을 토벌하는 일이 육본작전의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일을 거뜬히 해낸 나를 공산당에 세뇌된 자로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수행한 직책과 임무가 무엇보다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자부한다.

29. 잉여인간

여름철을 시원하게 보내며 육군대학을 마쳤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그동안 두뇌를 너무나 혹사시킨 나머지 학업연수를 하기에 힘에 겨웠고 따라서 성적도 상위권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대신 고등군사학 분야를 두루 터득할 수 있었다.

졸업 후 경북 병사구 사령관에 보직되었다. 인사발령을 받는 순간 “나는 역시 덤으로 사는 잉여인간이구나.”라는 자각증상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졌다. 병사구 사령부의 임무는 막중한 것이었다. 군의 중추를 이루는 병사를 증집하고 예비군을 장악하여 보충 병력의 소집 등 병력보충의 근원적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관이 조금 다른 이미지로 부각이 되어 기관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던 시대였다. 사령관 자리 역시 인기 없는 직책이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했다.

병참 등 군수물자를 다루는 일부 장병이 군수품 부정유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병사구 사령부에서는 징병검사나 소집 등에서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징소집을 면제해주는 방법으로 군기를 어지럽게 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로 사령부는 대외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을 얻고 있었다. 내가 취임한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편성에도 없는 소위 문관이라는 자들이 30여 명이나 있었다. 그들에게 급여가 지불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주택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다.

사령관인 나는 오히려 부모형제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 하숙비조차도 절약을 해야 하는 처지라 사무실 한구석에 목침대를 두고 기거하며 식사는 사병식당에서 해결했다. 그런데 그들 문관들이나 장교들 심지어 고급하사관까지도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모조리 영외에 있는 민간음식점으로 가서 반주를 곁들인 호화로운 점심을 즐겼다.

이렇게 단순한 예 하나만으로도 남들에게 주는 인상은 그리 곱지가 않았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상급부대나 인접부대의 인간들은 그 문관들을 잘도 착취했다. 30여 명의 문관들이 사실은 그들의 입김으로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문관들은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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