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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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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02회 작성일 19-06-03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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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야나세 부대 II

포성도 멈추고 비행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면서 전선이 불안할 정도로 고요했다. 멀리 보이는 초원에는 적색과 백색의 깃발이 줄지어 세워져있고 그 너머 지평선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제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우리부대는 12월 초에 원대로 돌아왔다. 나는 휴식은 고사하고 뒷정리도 다 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시 출동명령을 받았다. 북부 만주에 있는 북안성 일대에 모택동군의 유격대가 침공해 왔다는 것이다. 그 침략군을 토벌하기 위해 보병전투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출동하는 것이었다.

북안성 하이룽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12월 중순경이었지만 말로만 듣던 북만주의 강추위를 처음으로 체험했다. 꽁꽁 얼어붙은 장갑차의 엔진을 목탄불로 겨우 녹여서 철도화차에서 끌어내렸다. 도착한 곳은 만주군의 모 여단본부였고 나이든 장군이 여단장이었다. 그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고 숙소도 비교적 깨끗했다. 알고 보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의 적이었던 장쉐량의 저택을 여단본부로 삼고 그의 사병들이 묵었던 그 뒤쪽에 서있는 건물들은 우리 숙소로 사용되었다.

며칠 후 공비들을 토벌할 계획이므로 그 동안 모든 정비를 완전히 마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때 나는 우리가 토벌해야 하는 상대가 우리의 독립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은밀히 알아보았더니 우리 독립군은 모두 중국 북부로 떠나고 지금은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12월이 지나고 새해 초가 되어 우리는 작전을 개시했다. 그쪽 지역 역시 끝없는 초원지대였고 땅이 얼어붙어 아무 곳이나 차량이 지나갈 수 없었다. 들판 군데군데에 아름드리 원시림이 있었고 더러는 나무들이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있기도 했다. 여름에도 땅속 1미터 지점에는 얼음이 녹지 않아서 나무들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바람이 심하게 불면 쓰러져버리는 것이었다.

중국에 ‘4비’가 있었다고 들었다. 1비는 ‘관비’로 관리들이 국민을 수탈해가기에 이렇게 불렀고 2는 ‘군비’라고 했다. 각 군의 군인들 역시 약탈이 극심했다. 3은 ‘교비’ 혹은 ‘학비’라고 했다. 교육자들이 교묘한 수단으로 국민들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는 ‘토비’ 혹은 ‘마적’이란 자들이다. 말 그대로 강도 집단인 것이다. 이들은 반정부 입장에서 혁명군을 자처하며 국민들을 착취하고 부녀자들을 강간, 살인하며 방화와 같은 악행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악질 중 악질들이었다. 우리는 이 ‘토비’들을 잡으러 나섰다.

드디어 작전이 시작되었다. 보병을 수송하는 수송대 앞과 뒤에서 이들을 호송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장 선두에서 수색을 하며 전진했다. 그 시절에는 지뢰가 깔려있지 않아서 안심하고 다닐 수 있었다. 토벌대는 중대병력쯤 되는 규모였다. 그들의 중대장처럼 보이는 중국인 대위가 내 차에 타 포대에 앉아서 길을 안내했다. 소대장 대리였던 나는 소대를 이끌고 파견되었던 것이다. 약 1주일가량을 눈에 덮인 벌판에서 추격을 하던 끝에 어느 지점에서인가 야영중인 공산군을 포착했다. 중대장과 일본인 참모장의 작전대로 공격이 개시되었다.

나의 장갑차에서는 포에다 인마살상용 유탄을 장전하고 중기와 경기를 오랜만에 쏘아댔다. 보병들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적을 괴멸시켰다. 재빠르게 도망간 기마공비가 5,6명 정도였고 사살된 자가 약 20명, 부상포로가 약 30명 정도 되었다. 최근에 보기 드문 대전과라고 여단본부에서 소식이 왔다.

그날 밤 중국인 부락에서 민박을 하며 참모장과 일본인 통신사 그리고 조선인 하사관들이 모여 중국술인 고량주로 축배를 들었다. 중국 땅에 와서 중국인들 죽이고 축배를 드는 상황이 참으로 모순이었다.

그 해 5월까지 수차례의 토벌작전이 펼쳐졌고 그 결과 공비들도 대부분 소탕되었다. 그곳에는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하이룽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술집이나 정미소, 잡화점 등을 운영하기도 했고 농촌으로 가면 중국 사람들과는 다르게 물을 끌어다 논농사를 짓는 농가도 많았다. 그들의 삶의 터전을 조금이나마 보호하게 된듯하여 나의 고생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곳 사람들은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앞을 다투어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김치 등 우리음식을 대접해주었고 그들의 집에 가면 우리말로 노래도 하며 즐길 수가 있었다.

우리 소대에 이상병 이라는 조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정미소에 부지런히 드나들더니 결국 그 집 딸과 뜨거운 사이로 발전되었다. 우리가 원대복귀 후 그는 결혼식을 올렸고 해방 후에는 서울로 돌아가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6월 초에 원대 복귀한 나는 제대준비에 분주했다. 야나세 부대는 1년 6개월이 만기로 되어있었다. 한 번은 부대장에게 불려갔다. 그가 말하기를 “일본인 한 사람을 당해내려면 중국인 열 사람이 있어야 하고 조선인 한 사람을 이기려면 일본인 다섯 명이 있어야 한다.”며 “자네도 제대를 하지 말고 직업군인으로 남았다가 기회를 보아 군관학교(만주사관학교)에 가서 장교가 되는 게 어떤가?”라며 직업군인이 될 것을 제안했다.

나 역시 나쁜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지만 당시의 나는 ‘나무젓가락’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체구가 왜소했었다. 신체검사에서 이미 낙방할게 자명한 일이어서 일찍 단념하는 게 옳다는 생각에 그의 제안을 사양했다. 그 때 군관학교에 갔더라면 고 박정희 대통령과 선배 아니면 동기로 그곳에서 만났을 것이다.

나는 그 해 6월말에 재대했다. 제대를 하는 나에게 훈장이 주어졌다. 일본정부가 주는 무공훈장 욱일장과 만주정부가 주는 경운장, 노몬한 사건의 종군기장이 수여되었다. 약간의 상금과 기념품을 받아들고 우선 신경전에 있는 통관회사 사장을 찾아갔다. 내가 신병시절 면회도 와주었던 고마운 분이었다. 그 분은 나를 중국식당으로 데리고 가 성대한 환영과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고 자기 회사에서 다시 일하라고 했다.

나는 관리가 되고 싶었고 그게 안 된다면 작으나마 나만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 버려진 미개지를 개척하고 싶었다. 24세의 백수가 또 다시 무모한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일단은 고향에 가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나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단돈 27전을 손에 쥐고 건넜던 압록강을 이제는 고국을 향해 건넜다.

고향의 가족들은 모두 건강했고 내가 매월 보낸 돈이 적으나마 가계에 보탬이 되어 생활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동생들도 수업료를 못내 정학을 당하는 일 없이 공부를 잘하고 있었다.

7. 8.15 해방

그 사이 나는 고향과 만주를 오가며 사업체를 운영했고 만주에서의 사업도 활기차게 발전했다. 1945년이었다. 둘째 여동생이 1월 초에 결혼을 한다고 하기에 당시 고향에서는 보기 힘든 모피외투를 걸치고 고향을 방문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후 만주로 돌아가려고 할아버님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그 때 할아버님은 경무부 특고과의 특급요시찰 대상이었는데 조선 사람인 고등계 형사가 곧 숙청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주었다. 그 사람 덕분에 할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하직인사를 드리는 나에게 할아버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경영하는 일이 잘된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금년 5월이나 8월에 전국에서 일대 변화와 큰 혼란이 올 예정이다. 잘 되어가는 사업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 금년 4월말까지 너의 식솔들이라도 우선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일이 일어나거든 너 혼자 혈혈단신 가볍게 고향으로 돌아오너라.”

그리고 조금 우울한 표정으로 말씀을 이으셨다. “해방을 맞이해도 3년 정도는 군정의 비서정치로 이어질 것이고 공산당의 책동으로 수백 명이 죽을 것이다. 국토 전체의 자주적 완전 독립은 어려울 것이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시며 비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우리가 바라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하시며 한숨을 길게 내쉬셨다.

만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도 만주에서의 일상에서도 할아버님의 말씀이 내내 귓전에 맴돌았다. 중국 현지의 소식들도 ‘일본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만주에서 쌓아올린 삶의 기반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변해가고 있고 나는 그에 대처해야 했다.

결국 일본은 무조건 항복과 함께 패전했고 우리민족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나 개인에게는 그동안의 공든 탑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나는 평상시와 같이 회사에 출근하려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때 느닷없이 경찰서의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요란한 소리가 그치더니 시내 곳곳에 매달린 스피커를 통해 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방송이 있으니 오전 12시에 라디오를 들으라는 소식이었다. 나는 예감이 이상해서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12시가 되니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의 떨리는 듯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디오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그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시내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가보니 한, 중 초등학교 학생들과 젊은 선생님들이 태극기와 중국 국기를 그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인지!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내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 구겨진 종이에 태극기를 그려 나무 회초리에 풀로 붙였다. 완성된 우리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소년소녀 대열에 끼어 ‘조선 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군사 앞잡이도 없었고 순경이 나타나 매질을 하는 일도 없었다.

관동군의 주력은 남방전선으로 모두 빼돌리고 소집된 소수의 경비병만 국경에 남아있는 상태였고 그나마도 소련의 배신으로 기습공격을 당한 일본은 패망에 패망을 거듭했다. 내가 있던 만주 지역에도 얼마 전에 경무장한 일본군 부대 1개 대대가 와서 시 외곽 큰 다리 밑에 주둔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공병대로 벌목을 하기 위해 온 부대였다.

젊은이들이 무장해제를 한다고 하기에 호기심이 발동되어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좌 계급장을 달고 있는 중년 장교가 할복한 채 죽어있었고 장교와 선임으로 보이는 하사관 몇 명도 같은 자세로 쓰러져있었다. 그들의 군인정신교육을 경험한 나로서는 그 행위를 칭찬해야할지 비난해야 할지 심정이 착잡했다. 함께 갔던 중국인 청년도 그 광경을 보고 기가 질린 듯 입을 벌린 채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일본군 선임 장교로 보이는 사람이 있기에 나는 “이 지방 치안에 필요하니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우리에게 넘기시오.”라고 유창한 일본말로 말했다. 나의 말을 들은 장교는 “무기를 정리해서 이미 저쪽에 쌓아두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대검만은 간직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병사들이 소총을 열 자루씩 묶어서 다리 밑에 정리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대검까지 내놓으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남쪽을 향해 조선 땅으로 간다고 했다. 국경까지 통하는 길도 없었지만 길이 있다고 해도 걸어서 45일 정도 걸리는 거리다. 가지고 있는 식량도 넉넉해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에게서 압수한 무기를 달구지에 실어 마을에 있는 가공서(읍사무소) 창고에 보관하고 보초를 세웠다.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데 중국인, 조선인 청년 몇 명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마을의 치안을 확립하기 위해 보안대를 세우려고 하니 나더러 대장 역할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청을 거절하고 대신 내회사의 최 상무를 추천했다. 최 상무는 망명이민자 2세로 중국말도 능숙하게 잘하고 머리 회전도 잘 되는 유능한 젊은이였다.

그들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수용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배급 제도를 변경했다.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중국인에게는 밀가루와 쌀을, 조선인에게는 쌀을 그리고 일본인에게는 콩만 배급하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 상주해있던 법원장이나 검찰지청장 등의 굵직한 자리의 일본인들은 어느 사이에 도망갔는지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자 나는 몇몇 일본인 친지의 안부가 걱정되었다. 먼저 진현장 댁에 가보니 살림살이는 어느새 다 치웠는지 조그만 여행가방 하나만 진현장 옆에 놓여있었다. 만남이 반가웠지만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는 달구지가 마련 되는대로 길을 떠난다고 했다. 나는 그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하지 못한 채 작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마을 중심지에서부터 총을 난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총소리는 멈추고 이웃집 청년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 청년들이 좌우파로 나뉘어 분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암담하기만 했다. 침략자가 패망하고 이제 겨우 이틀 지났는데 세력 다툼에 총을 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런데 소련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너무나 반가워서 동구 밖까지 나가보았다. 장갑차를 앞세운 1개 소대 규모의 기동부대였다. 처음 보는 소련군이었다. 그러나 일본식 군사교육을 받은 나는 그들의 동작을 보고 큰 실망을 했다. 어디를 보아도 군기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거리로 진입한 그들은 시민들의 시계와 귀금속 등을 눈에 보이는 대로 약탈해가고 반항이라도 하면 “일본인!”이라고 소리 지르며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재수 없는 사람은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소련군은 은행과 관청 등 금고가 있는 곳에 폭탄을 설치해 터뜨리고 안에 있는 돈과 값나가는 물건들을 약탈해갔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기다리던 해방군이라는 자들이 들어와서 저지르는 만행이라는 것이 약탈과 살인, 강간이었다.

나는 극도의 실망감으로 병이 날 지경이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상무인 최 씨와 의논하여 회사를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회사재산을 출자한 액수에 비례하여 배당하기로 했다. 그동안 회사 운영이 잘 되어 이익도 조금 남았다. 이것으로 나의 대륙에서의 야망도, 푸르기만 했던 희망도 산산조각이 되어 깨졌다. 허탈한 심정을 달래며 고향 길에 올랐다.

8. 서울 고생과 육사 응시

고향으로 돌아와 조부님 그리고 부모님의 평안하심과 안심하시는 모습을 보았고 동생들의 발랄한 얼굴도 보았다. 일본 북해도 탄광으로 끌려갔던 남동생도 해방 직후 귀국해 집으로 돌아와 있었고 나도 이렇게 돌아오니 어른들은 이제 더 이상 걱정이 없으신 것이다. 친척집과 가까운 이웃집에 인사를 갔다. 모두들 편안했지만 징용, 징병 심지어 정신대에 끌려간 자녀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는 집도 더러 있었다.

우리 친척집에 나와 동갑나기가 한 명 있었는데 그가 지원병 소집으로 끌려갔다가 남방전선에서 전사한 일 외에는 거의가 다 돌아와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돌아오련만 해방을 누구보다 기뻐하실 어른 한 분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사상은 달랐지만 나를 귀여워해주시던 김 선생님이 병사 하셨다는 말을 뒤늦게야 들었다. 가슴 아픈 일이어서 산소에 꽃이나 한 송이 바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약 6개월 남짓 지난 그 때 벌써 나의 고향에서도 좌파니, 우파니 하며 젊은이들이 편을 가르고 싸움이 치열했다. 그래서 나는 김 선생님 묘소를 찾지 못했다. 공연히 본의 아니게 좌익으로 오해 받기 쉬울 것 같아서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도 십여 일이 지났고 곧 다가오는 아버님 회갑 준비도 해야 했다. 꿈속에도 갈망하던 해방이 되었으니 성대한 잔치를 벌이고 싶은데 모아두었던 돈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생계를 유지하느라 다 써버리고 이제는 교자상 하나 겨우 차릴 정도의 형편에 불과했다. 다행히 친척 어른들께서 오셔서 상을 차리고 헌수를 돌렸다. 부모님은 소를 잡아 큰 잔치를 하는 것 보다 더 기뻐하셨다.

아버님께는 멀리 갔던 자식들이 무사히 돌아온 일이 성대한 잔치보다 몇 배는 더 기쁘신 듯 했다. 이 얼마나 큰 부모님의 사랑인가. 아버님의 작년 농사가 잘 되어 봄까지의 식량은 해결되었으나 그 후부터가 걱정이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버리고 저축한 돈도 없던 나는 앞길이 막막했다. 조부님을 비롯하여 열두 명의 대가족에게 또 다시 빈곤이 몰아닥치는 것인가 생각하니 우울하기만 했다.

우선 먹고살 길을 마련해야 했으나 해방직후의 사회질서는 극도로 어지럽고 좌우익 투쟁은 날로 심해지면서 찬반탁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믿을만한 지도자가 없는데다가 제각기 잘나서 정당만 우후죽순처럼 난립했다. 이런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부님께서는 해방 후 일단 상경하셨으나 역시 가진 게 없이는 자기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세태였다고 했다. 옛 제자이신 이삼육 선생 댁에 기숙하셨으나 그 댁도 오래 머물 곳은 못되어 다시 귀향하셨다.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팔십 고령의 조부님께서 혼탁한 시국에 휘말려 고생하시는 것보다 시골 전원에서 편안하게 지내시는 게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젊은 나는 이런 좋은 기회에 팔짱끼고 남이 하는 일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니 가슴이 터질듯 할 지경이었다. 무엇이든 건국에 이바지해야 할 터인데 라고 고민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나에게 급선무는 식구들을 부양하는 일이었다. ‘수신제가 평천하’ 라고 했다. 수신도 제가도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평천하를 할 것인가. 몇 년 전 단돈 27전을 주머니에 담고 압록강을 건너던 만용이 부럽게도 생각났다. 답답하기만 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 읍내 어른 한 분이 찾아오셔서 “자네 요즘 아무 일도 안 하거든 청년운동이나 하세. 우선 반탁운동 먼저 해야겠네.”라고 말하셨다. 이 분은 해방 전에는 건달왕초로 별로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해방 후 완전히 애국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해방 전에 가끔 우리 집 사랑채에 와서 조부님과 어울리는 일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때 독립운동은 서울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몇 명의 젊은이들과 농촌을 찾아다녔다.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러워 하던 농민들을 모아놓고 반공반탁 이론을 알아듣기 쉬운 말로 떠들어댔다. 청중 속에는 지식인도 있었고 나이든 유지어른도 끼어 있었다. 나의 유세는 날이 갈수록 고조되었고 평도 좋았다.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오고 그런 이론들을 언제 배웠던 것인지 내 스스로 생각해도 논리정연하고 시원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나 혼자만의 자화자찬인가도 싶었으나 남들도 나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만한 지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남다른 웅변가는 더욱 아니었다. 다만 소년기부터 자리 잡은 반공이념과 만주에서 9년간 겪은 체험들 그리고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공산주의와 얼굴을 맞대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공포와 불안, 초조, 굴욕, 고통, 위기와 절망 등이 한꺼번에 폭발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주민들 모두가 방관만 하던 태도에서 반공반탁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십대 청년들 가운데 사상을 돌리지 못한 자들을 대상으로 선도를 하기도 했고, 협박이 가해지기도 했지만 끝내 돌아서지 못하는 골수분자도 있었다.

4월말 늦은 봄 어느 날 조부님이 원하시는 대로 서울을 향해 떠났다. 야간화물차에 비집고 들어가니 장사꾼들과 신혼부부도 보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서로 등을 마주대고 기대앉은 채 모두들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승객으로 가득 차 고생이 막심했으나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열차에서와 같은 불안과 공포감은 가질 필요가 없었다.

날이 밝고 공기가 시원한 아침녘 서울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당숙의 안내로 익선동에 있는 전라도 감부 장 모 씨의 저택 별관을 빌려 조부님을 그곳에 모셨다. 그 순간부터 몸서리가 쳐질 정도의 서울고생이 시작된 것이다. 상경할 때 가져온 양식이 바닥났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막노동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일을 할 만한 곳은 이북 피난민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뜨내기에게는 발붙일 틈을 주지 않았다. 허리가 휠 정도로 무거운 고리짝을 고향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것이 있었는데 그 속에 들어있던 약간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팔아 끼니를 이을 수 있었다.

초저녁이 조금 지났을 때라고 기억된다. 현관에 인기척이 들리기에 나가보니 놀랍게도 백관수 선생께서 와 계셨다. 선생의 큰아드님은 적지 않은 양식을 양손에 들고 계셨다. 선생과 조부님은 얼마동안 담소를 나누셨다. 두 분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내용은 잘 모르지만 고적하기만 한 곳에 하인도 아닌 큰아들에게 무거운 것을 들게 하고 오신 그 성의가 무엇보다도 감사할 뿐이었다.

얼마 후에는 동향인이신 소완규 변호사께서 다녀가시면서 금일봉과 양주를 한 병 선물로 주고 가셨다. 후에 서울대 총장을 지내신 최규동 선생도 비서를 보내어 우리의 궁핍한 생활을 살펴보게 하셨다. 이렇듯 독지가들의 고마운 도움이 간혹 있었으나 그것으로 근본적인 생활고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그 날도 양식이 떨어져 조부님께 조반을 지어드리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포에 사는 외숙 댁에 갔다. 마침 대청마루에 두 가마는 족히 됨직한 양의 쌀을 쏟아놓고 쌀벌레를 고르고 있었다. 남도 아닌 외사촌은 벌레가 생길 정도로 쌀을 쌓아두고 사는데 팔십이 넘으신 노인은 조반을 거르시다니 세상이 불공평해도 이정도일 수가 있겠냐는 생각에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해방 전 외숙이 실업자 신세가 되었을 때 조부님은 그에게 직장을 구해주셨고 해방 후 근무하던 직장도 조부님의 입김이 서린 곳이라고 들었다. 구차스럽게 공치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억누르며 돌아섰다.

고생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동사무소에서 오라고 하기에 갔더니 영문으로 인쇄된 튼튼한 종이상자를 한 개 주었다. 일종의 구호물자였다. 상자를 집으로 가져와 뜯어보니 미군용 휴대용식량이 들어있었다. 우리가 먹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스낵종류였다. 미군들이 즐겨 먹는 커피나 캔디, 초콜릿 등은 지금 내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생각 끝에 이것들을 큰 길로 가지고 나가 펼쳐놓았다. 미제라고 하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기대 이상으로 잘 팔려나갔다. 물건이 거의 다 팔릴 무렵이었는데 순경이 오더니 외제물자 암거래행위를 한다며 나머지 물건들을 압수하고 나를 파출소로 연행했다.

약간의 돈이 생겨 쌀을 살 수 있겠다고 내심 좋아했는데 모든 게 허사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순경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남은 과자를 잘도 먹어댔다. 시간은 자꾸 가고 집에 돌아가 점심도 거르신 조부님께 저녁이라도 때에 맞추어 지어드려야 하는데 그들은 나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암거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합법적으로 얻은 물건이고 미제 물건을 팔면 안 된다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순경들은 한 술 더 떠 물건을 팔아 번 돈까지 모두 빼앗고서야 나를 풀어주었다. 어차피 얻은 물건들이었으니 밑져야 본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으나 이 세상의 질서가 이렇게 문란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을 하니 분통이 터져 죽을 노릇이었다.

나도 모르게 간 곳이 파출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소완규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마침 소 변호사께서 계셨다. 처음에는 화가 치밀어서 말문이 막힐 정도였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는 즉시 사무장과 나를 파출소로 보냈다. 파출소의 순경들은 내게서 빼앗은 돈을 서로 나누는 중이었다. 사무장은 그들의 우두머리와 단판을 지었다. “이 일은 범법일 수도 없으며 설사 범법이라고 해도 압수한 물건들을 당신들이 다 먹어치우고 돈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냐.”고 따졌다. 또한 범법자라면 범인을 기소송치 해야 마땅하지 임의로 풀어줄 수 있느냐고 강력히 항의했다. 사무장의 논리에 결국 손을 들은 순경들은 내게서 빼앗은 물건들과 돈을 돌려주었다. 사회질서가 이렇듯 어지러운 시대였다.

며칠 후 파출소장이 우리의 거처로 찾아왔다. 앙갚음이라도 하려나 하는 지레짐작에 불쾌하기까지 했는데 그는 의외로 사죄와 더불어 조부님께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돌아갔다. 이 자는 최 씨라고 했으며 후일 의외의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한 여름 장마철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오신다는 전갈이 왔다. 우리 거처는 큰 길에서 이십 미터쯤 떨어진 작은 골목 안에 있었기에 난처한 일이 생겼다. 백범 선생의 승용차가 큰 길에 도착했으나 때마침 쏟아지는 소나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절 우산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행랑채 처녀의 양산을 빌려 선생을 겨우 모시고 들어왔다. 보리차 한 잔 대접할 수 없는 빈곤한 생활이었다. 선생께 큰 절을 드리고 물러나와 생각하니 국가주석이 왕림하셨는데 아무 것도 대접할 것이 없다는 무력함이 절망감으로 번졌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행랑채 아주머니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받쳐 들고 왔다.

고마움의 인사는 나중으로 미룬 나는 얼른 우유 잔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 우유 잔을 올려놓고 물러나오려는데 백범께서 나를 향해 무어라 말씀하셨다. 마치 그 소리가 먼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천둥소리 같은 것이 분명 나를 향해 하신 말씀인데 그 자리에서는 알아듣지 못했다. 밖으로 나와 그 말씀을 되새김질 하니 “너도 조부님의 뒤를 이어서 조국과 민족에 충성스러운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 일이 있고 조부님의 심부름으로 경교장에 두어 번 간 적이 있다. 그때마다 백범선생께서는 나를 꼭 이층으로 불러 고마운 말씀을 해주셨다. 구구절절 애국애족 하라는 말씀이었고 당신의 세대에 이루지 못한 일들을 우리 세대가 완성하라고 하셨다.

당시 조부님은 돈암장 이박사와 경교장 백범선생을 화해시키려고 동분서주 하셨다. 백범을 뵌 후 생각나는 대조적인 일이 있었다. 상경 후 얼마 안 되어 조부님을 모시고 돈암장에 간 일이 있다. 돈암장 대문을 들어서니 그리 넓지도 않은 엉성한 정원에 남녀 십여 명이 서있었다. 이 박사를 뵈러 온 사람들이라고 짐작했다. 얼마 후 이십 세 가량의 백인 처녀가 현관에서 나오더니 이 박사께서 곧 나오신다고 알렸다. 조금 후 이석오라는 비서를 앞세우고 이박사가 나타났다.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두루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의 말을 나누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테면 합동면회였던 것이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조부님만큼은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 면담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광경에 그 실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이때 진주에서 상경했다는 부부로 보이는 한 젊은이가 “선생님, 우리 정부는 언제쯤 수립됩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이 박사는 “공산주의자를 다 잡아 죽여야 독립이 되고 통일도 되고 정부도 세워진다.”고 대답했다. 공산주의자를 다 잡아 죽여야 한다는 이박사의 답변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때 당시 이박사가 장차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리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인물의 입에서 과격한 표현이 나왔다.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언젠가는 개과천선하고 우리 국민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같은 의미라도 조금 다르게 표현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한 착잡한 심정으로 조부님을 모시고 거처로 돌아왔다. 이삼 일 후에 조부님의 서한을 이석오 비서에게 전달했다. 이석오 비서는 한학자이며 점잖은 중년신사로 정부수립 후 총무처장을 역임했고 이 박사에게 조부님의 뜻을 잘 반영하게 해 조부님과 이박사가 가까워지게 한 인물이다. 이 때 조부님이 쓰신 서신의 내용을 알지는 못했으나 수개월 후에 이박사가 보내온 답신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인즉, ‘그 때 선생(조부님을 가리킴)의 고견을 명심했더라면 오늘 나는 이러한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심장이 터지는 느낌입니다.’ (이 서신은 아직도 내가 보관하고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조부님께서 이 박사에게 보내신 서한의 내용은,
첫째, 그 당시 천정부지로 폭등하는 물가와 특히 식량대책
둘째, 군정 당국자들의 용공에 대한 경고
셋째, 우선 남한 만이라도 건국독립정부를 세울 것
넷째, 군정을 하루 빨리 종식시키고 비서정치에서 벗어날 것 등의 7개 항목이었다.

팔순노인이 끼니를 걸러 가시며 객지에서 건국사업에 고군분투하시는데 나는 그 뒷바라지도 제대로 못해드린다는 자책감에 아무 직장이라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손바닥은 굳은살이 박여 보기에 딱하기만 했다. 노인 한 분 모시고도 끼니를 제대로 못 잇는 상황에서 식구가 늘어나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잘 된 일인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 겪은 고생 정도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 싶었다. 나는 동네 장작가게에 가서 장작을 묶어주기도 하고 쪼개주기도 하는 노동을 했더니 밥을 굶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8월이라고 기억된다. 큰외숙 댁에서 외조모님 제사가 있다고 하기에 갔다. 그 곳에서 외사촌의 고향친구라는 경비대 하사관 한 명을 알게 되었다. 그에게서 경비대 장교 임용시험이 곧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 수속절차를 알아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의논하고 다음 날 조부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38선에서 죽으라고 하셨다. 그 날 즉시 통위부로 가서 지원용지를 받아왔다. 그런데 난처한 일이 생겼다. 경찰서장의 신원증명서를 첨부하라는 것이었다.

주민등록증이라는 것이 없던 시대여서 나 같은 경우는 그런 상황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일단 부탁은 해보자는 마음으로 경찰서로 갔다. 이 층 서장실에 갔더니 부속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이 열린 서장실을 들여다보니 서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상의를 벗고 의자에 벌렁 누워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좀 미련했던지 민원은 담당과에 제출해야 한다는 상식을 없었다. 그 때까지 경험이라고는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등초본을 떼어온 정도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도 일단은 서장을 깨워 용건을 말했다.

서장은 단잠을 깨운 일로 나를 괘씸히 여겼고 함부로 서장 나리 방까지 들어온 것이 못마땅한 듯 “네가 누구인줄 알고 신원증명서를 해주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부속실을 향해 빨리 이 놈을 내쫓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보기 좋게 쫓겨난 것은 그렇다 쳐도 서장을 화나게 했으니 증명서를 받기는 어렵게 됐고 지원서를 구비하는 일도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고향에 가서 서류를 만들어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내가 서장의 입장이라고 해도 무슨 근거로 신원증명서를 발급해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날 밤 조부님께 말씀드렸더니 신원보증은 한민당 백관수에게 가서 부탁하라고 하셨다. 나는 동아일보 3층 한민당사를 찾아갔다. 백관수 선생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신원보증을 부탁했다. 백 선생은 오히려 나를 치하하시며 “좀 더 좋은 직장을 선택할 수 있을 터인데 기특하다고 하구나.” 하시며 두 말 않고 서명과 함께 도장을 꽝 찍어주셨다. 그러나 두 분이어야 한다고 하니 마침 옆을 지나가시던 가인 김병로 선생에게 여기 도장을 찍으라고 하시니 이 분도 칭찬을 하시며 “군에 가서 열심히 하여 조부님의 뒤를 잇도록 해라.” 하시며 흔쾌히 도장을 찍어주셨다. 건너편에서 이 광경을 보시던 신사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무슨 음모를 하는 거여?” 하시며 물어보셨다. 잠시 나의 사정을 들으시더니 “그렇다면 나도 찍어야지!” 하시며 도장을 찍어주셨다. 그 당시 이 분들은 정계 거물들이신건 두 말 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가서 서장과 면담을 하며,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분들은 믿으시겠지요?” 하며 신원증명서를 그의 앞에 내놓았다. 당대의 거물이 한 분도 아니고 세 분이나 종이가 좁다는 듯 서명날인 한 종이를 본 서장의 반응은 마치 암행어사의 출동에 놀란 남원골 변 사또와 흡사했다. 그는 허둥지둥 나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권한 후 용지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돌아오더니 부속실을 향해 “손님에게 차대접도 안하고 뭐하고 있는 거냐!”며 또 고함을 질렀다. 고함을 치는 것이 그 사람의 특기라도 되는 듯 했다. 잠시 후 내 앞에는 노란 액체가 가득 찬 대형 컵이 놓아지고 한 사람이 급히 내 신원증명서에 큼직한 서장직인을 찍어서 가져왔다. 서장은 거침없이 자기 사인을 찍어서 나에게 두 손으로 바치다시피 공손하게 가져왔다. 몹시도 더웠던 날 시원한 차도 한 잔 얻어 마신 것에 사의를 표하고 경찰서 현관을 나섰다. 나의 뒤통수에 대고 안녕히 가시라며 거수경례까지 하던 그 서장. 어쩌면 같은 사람일진데 대하는 태도가 하룻밤사이에 저리도 다를까. 아부근성과 사대주의 근성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지원서가 갖추어져 제출했더니 수험번호와 안내장이 배달되었다. 9월 초순이었다. 태릉 사관학교에 출두하라는 통보였다. 교통편이 전혀 없던 그 곳에 아침 8시까지 도착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장작을 패서 쌀을 사고 남은 돈으로 왕복차비와 하룻밤 묶을 수 있는 숙식비를 떼어내 길을 떠났다.

시험은 신체검사와 국어, 수학, 역사, 외국어, 지리 등이었다. 다른 과목은 그런대로 하겠으나 수학이 큰 문제였다. 기하나 대수 따위는 풀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딪혀보자는 생각으로 친척집 중학교 꼬마의 중학교 역사책을 빌려다가 독학을 했다. 나이 30살에 머리가 굳어서 제대로 주입이 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정된 날 출두했다. 오전 중에 옷을 갈아입었다. 시멘트 포대 같은 종이에 사복을 싸두라고 했다. 한 꾸러미씩 옷을 싸서 놓으니 하사관들이 와서 어디론지 가져갔다. 지급된 헌 일본군복을 입고 있노라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만주 야나세 부대에서 먹던 고량밥과 기압 받던 일들이 흘러간 추억이랄까.

연병장에 도열하니 간단한 일정과 주의사항을 말해주더니 따라오란다. 가서 보니 식당이었다. 새벽에 여인숙에서 국밥 한 그릇 먹은 것은 이미 다 소화되어 출출하던 참이었다. 식판에 쌀밥이 가득 담겨있고 또 다른 그릇에는 구수한 야채국도 있고 단무김치도 몇 조각 곁들여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안내된 곳은 제법 큰 건물이었다. 아마도 강당인 듯 했다. 복도에서 옷을 다 벗고 팬티만 입은 채 입구에서 나누어준 용지를 한 장씩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요소요소에 서거나 앉아있었다. 팔에 갈매기를 두세 개씩 붙인 하사관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기도 했다. 신체검사장이었다. 신장과 가슴둘레 등 정석적인 신체검사는 다음날 오후에 모두 끝나고 발표가 있었다.

이때 지원한 사람 수가 약 350명 정도였다. 신체검사 결과 50명 쯤 탈락되었고 그들은 그 날로 돌아가야 했다. 나머지는 마룻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모포 한 장을 덮고 잠을 잤다. 후에 안 일이지만 박정희를 비롯하여 만군장교 출신이 5,6명 정도 있었다. 일군장교도 두어 명 있었고 중국군장교도 여러 명 있었는데 그 중 송호 장군도 있었다. 그 분의 수험번호가 나의 것보다 두 번호 앞서 있었기에 시험 내내 가까이서 그를 보았다. 그 다음으로는 대개 하사관 출신들이었다.

이렇듯 이전에 군사경험이 있는 자들을 모아서 단기간의 미국식 군사교육을 거쳐 장교에 임용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사관생도가 아니고 사관후보생이라고 불려졌다. 3일째 되는 날에는 학과시험이 있었다. 다섯 과목시험을 하루에 다 치러야했다. 앞에서 말했듯 수학은 백지에 가까웠으나 역사는 거의 다 쓸 수 있었다. 국어와 외국어, 지리는 상식적 수준이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을 쓸 수 있었다. 5일째 되는 날 아침 학과시험 결과 발표가 있었다. 약 80명이 탈락하고 220명 쯤 합격됐다.

나도 합격생 중 한 사람이었는데 수학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이라니 탈락된 사람들의 수준이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궁금했다. 발표가 끝나고 나의 시험번호와 이름을 불렀다. “그럼 그렇지 합격할 이유가 없지.” 라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사복차림이 하는 말이, “역사에서 자네가 일등일세. 더욱 더 공부해서 우리 역사를 더 잘 알아야하네.”라고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해주었다. 어리둥절하고 있노라니 내 옆에서도 수학, 국어, 지리 등의 과목에서 점수가 우수한 수험생들이 불려나와 담당시험관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었다.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날도 여전히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은 면접이 있다고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시험관 앞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행군이 어쩌고저쩌고 몇 마디 물었으나 그나마 군대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상식적 수준의 질문들이었다. 면접이 끝나나 싶었더니 짓궂은 시험관인 중위 한 사람이 느닷없이 큰소리로 “이 자식, 너 지금 입고 있는 상의 단추가 몇 개냐?”라고 물었다. 한 방 먹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졸지에 공격을 당한 탓에 단추가 몇 개인지 몰랐다. 나는 “제기랄!” 하며 갑자기 상의를 훌렁 벗어 바닥에 놓고 단추를 셌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시험관들도 질린 듯 했다. 나는 단추의 수를 정확히 세어 정확히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모르는 적정은 직접정찰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요.”라고 말했다. 화를 낼 듯도 한 시험관도 이 한 마디에 공감하듯 웃으며 “적이 여덟 놈 인줄 알았으면 어서 상의를 입어라.”며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다음날이다. 한나절이 다되어 연병장으로 모이라고 했다. 합격자를 발표한다고 했다. 고급장교들과 사복차림의 문관 그리고 미군장교도 몇 명 있었다. 합격자 발표가 시작되고 수험번호와 이름들이 불려졌다. 100 번이 넘었을까 할 때 내 이름과 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104 번이었다. 이 번호가 졸업 때까지 나의 교번이 되었는데 성적순으로 부여된 번호는 아닌 듯 했다. 정확히 200번까지 부르고 끝이 났다. 약 350명 중에서 200명이 합격하고 나머지는 탈락한 것이다.

합격자들은 키순서대로 줄을 서 번호를 붙이고 짝수와 홀수로 나뉘어 A, B, C 중대로 편성이 된 후 또 다시 키순서대로 8, 9 명씩 내무반을 편성했다. 나는 키가 작아 제일 마지막 반인 12 내무반에 편입되었다. 지금까지 기거하던 마루방에서 총과 휴대품 등을 가지고 벽돌집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쇠침대가 여덟 개 놓여있었으나 매트리스는 없고 모포만 세 장씩 놓여있었다. 일주일 동안 익힌 구면이었지만 내무반원들끼리 다시 인사를 하고 각자 사물함을 정리했다. 나이는 내가 제일 많았으며 이북 출신 5명과 전원 8명이었다. 학벌도 다양했다. 대학졸업자가 2명 일군하사관 출신이 2명 있었다.

대략 정돈이 되었고 다음날 있을 행사를 위해 소총을 손질해야 했다. 이때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총에 일본천황의 국화문장이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일본군은 실수로 바닥에 넘어지는 경우에라도 사람이 먼저 넘어지고 그 다음에 총을 넘어뜨리라는 광신적인 소총 숭배정신을 주입시키는 자들이었다. 그 국화문장이 어찌되었나 하는 생각이 번득 나기에 총을 살펴보았다.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문장은 깨끗하게 지워져있었다. 소총 손질을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노라니 조교하사관이 들어왔다. 그는 녹색 갈매기 세 개가 표시된 계급장을 가지고 와서 팔에 부착하라고 지시했다. 후보생 계급장으로 중사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세 개의 갈매기 수는 동일한데 색깔이 녹색이고 위에는 노란색깔의 별이 한 개 더 붙어있었다.

조교하사관은 임 후보생이 누구냐고 물으며 우리를 둘러보았다. 이 방에서 임씨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다음에 안 일이지만 육사 2기생 200명 가운데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라고 하며 앞으로 나서니 폭이 1센티, 길이 3센티 쯤 되는 녹색표지를 주며 옷소매 끝에 달라고 했다. 이것은 소대장후보생이라는 표시라고 했다. 그날 밤 점호 때 나는 일주일간 소대장 근무를 명령받았다. 후보생들이 돌아가며 장교근무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음 주부터는 내무생활의 모든 일을 자치제로 하게 된다고 했다.

어느덧 밤은 깊어갔다. 내일은 입교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그간 틈나는 대로 해 온 제식훈련과 사열, 분열을 하게 된다고 했다. 고관들도 온다고 들었다. 옆자리 친구도 잠을 못 이루는 듯 계속 뒤척였다. 나 역시 마치 어린 소년처럼 마음을 설레며 잠을 설쳤다. 이나마 직장을 얻었다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원수와도 같은 공산주의를 직접 무너뜨릴 수 있는 직업이라는 점이 만족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이전에 익혀둔 군사지식을 고도로 활용하자고 다짐도 했다.

이런 생각들에 잠기니 현 정국이 한심하기 그지없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조부님과 처자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을 못했다. 답답하기도 하고 조부님께 죄송스럽기도 했다.

내일 입교식이 끝나도 외출을 보내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 곳에 들어오기 전 날 밤의 꿈이 생각났다. 내가 기거하던 그 집 이층 방에 나있는 동쪽 창을 통해 바라보면 길 건너 상점 간판에 푸른색으로 용이 그려져 있었다. 꿈에서 그 용이 간판 밖으로 뛰어나오더니 푸른 하늘로 꼬리를 치며 솟아올라 동쪽하늘로 사라져가는 꿈이었다. 등용문이라는 옛말처럼 선비가 용꿈을 꾸면 과거에 등과한다고 전해온 말이 생각났다. 약속된 발전을 되새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9. 사관학교 후보생

다시 새 아침이 밝았다. 1946년 9월 15일 아침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우리민족의 군인은 아니지만 장래가 약속된 군인이 되는 아침이 밝았다. 아직 해는 밝지 않았지만 연병장에는 분대별로 정렬되었다. 나는 10, 11, 12분대 중앙에 섰다. 각 분대장후보생이 몇 분대 총원 몇 명, 사고 무, 현재원 몇 명 이상 없음! 하는 일조점호 보고를 받았다. 그 순간 그 소리가 머나먼 어느 공간에서 오랜만에 메아리치며 돌아오는 듯 했다. 그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나라와 민족의 군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고 있었다. 나에게 또 다른 운명으로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리하여 나의 새로운 운명은 시작되었다.

새로 지급된 피복은 누런색으로 물들인 광목으로 지은 점퍼 비슷한 상의에 당꼬바지처럼 생긴 하의, 그리고 일본군 군화, 모자는 별표시만 떼어낸 일본군 전투모가 전부였다. 널찍한 가죽벨트 좌우에 일본군 탄창을 달고 대검을 찼다. 무기 또한 일본군 소총 한 자루씩으로 영락없이 패망한 일본군의 모습 그대로였다. 장교복은 옷의 색상만 국방색으로 우리 것과 구별했고 우리 것과 같은 모양의 군복에 가죽장화와 어깨끈이 달린 허리띠에 지휘도를 찼다. 정모라는 게 일본군이 쓰던 정모의 붉은 테두리를 녹색으로 덧씌운 것이었다. 그나마도 모자라는지 우리들 신입생들은 전투모를 착용해야 했다. 복장이야 어떻든 내 생에 처음으로 오른 손을 들고 선서라는 것을 했고 사열과 분열 후 입교식을 마쳤다.

이 때 사열대 위에는 고위층 여러분이 참석했다. 그 가운데 우리와 같이 시험을 치르고 신체검사를 받았던 송호 장군이 정복에 정모를 쓰고 소령이 되어서 고관들 사이에 의젓하게 앉아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이런 일이 과도기에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거니 내 나름대로 이해를 했다.

고위층이 돌아가고 교장 이하 교관과 행정요원들의 소개가 있었고 모든 행사를 끝내고 내무반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또 한 번 기이한 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정복과 정모 차림에 번쩍거리는 가죽장화를 신고 거기다 근사한 지휘도까지 옆에 차고 대위 계급장을 단 자가 앞에 나타난 것이다. 얼굴을 보니 일주일간의 가입교 기간 동안 같이 시험을 치룬 안 씨라는 나이든 위인이었다. 이 자는 해방 전 일본군 운전수로 일했다고 자기를 소개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험에서 낙방하고 떠난 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위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지금 막 입교식을 마친 우리들 중에는 박정희를 비롯해 해방 전 일본군, 만군에서 대위로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지만 전직 일본군 운전수가 무슨 수로 그렇게 출세할 수 있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는 한 술 더 떴다. 우리를 향해 “자네들!”이라며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자네라고 부르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꾹 참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졸업하면 좋은 곳에 가도록 힘써 주겠네.”라며 거들먹거리기까지 했다. 아니꼽기 그지없었으나 특별히 나를 지목해 말한 것이 아니니 그대로 묵살해버렸다, 그러나 이곳에도 예외 없이 비리가 존재하는구나 하는 허탈감이 들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자는 많은 실패담을 남기고 후에 육군 숙군 때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밝혀져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 날 주식은 회식이라며 고깃국에 반찬도 한두 가지 더 나왔다. 식사에는 교장 이하 장교들도 참석했다. 오후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극기 훈련이 시작되었고 오전에는 강당에 모여서 각종 전술 등 학과를 연구했다. 교관도 수준급이었고 미국 장교도 나와서 강의를 했다. 오후에는 집총훈련을 비롯하여 전투훈련을 했다. 엄하다고 소문난 일본군의 훈련보다 더 혹독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만 단시일 내에 소정의 학과를 연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해도 되고 자발적으로 성실히 임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주일이 지나가고 내일은 일요일이었다. 토요일 오전 과목이 끝나고 담당 조교하사관이 와서 외출을 할 수 있다는 말과 자세한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복장은 입교식 때 입었던 그 차림으로 구두와 각반을 잘 닦으라고 했다. 부지런히 외출준비를 마치고 연병장에 집합하니 당직사관이 복장검사를 하며 세심하게 주의사항을 상기시켰다. 갑자기 다시 소년이 된 기분으로 일주일 전 사복차림으로 들어섰던 정문을 나섰다. 4킬로미터 가량 걸어 나오니 경춘 국도에 다다랐다. 지나가던 트럭을 세워 청량리까지 얻어 타고 올 수 있었다. 전차를 타고 종로 3가에서 내렸으나 그곳에서부터 집까지 어떻게 갔는지 모른다.

반가워하는 아이들을 제쳐놓고 조부님 방에 들어갔다. 조부님께서는 나를 대견스러워 하셨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으나 구절구절이 애국애족 하라는 말씀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방에서 물러나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볼을 비벼댔다. 그리도 부드럽고 탄력 있던 뺨이 여위고 거칠기만 했다. ‘굶기를 밥 먹듯 한 탓이겠지. 오냐, 조금만 참아다오. 우리에게도 다시 광명이 찾아올 것이다. 어떤 고생이라도 참고 견뎌 졸업해 임관하겠다.’고 아이들과 약속했고 내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그동안 신세진 쌀집과 장작가게, 구멍가게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마치 자기 일인 듯 잘했다며 반가워했다.

그날 밤 백관수 선생을 방문했더니 어찌나 반가워하시는지 내가 도리어 민망했다. 그 분 역시 말씀마다 위국충절을 다 하라고 강조하셨다. 차와 과일을 대접받으며 경찰서장의 신분증명서 이야기를 들려드렸더니 박장대소 하셨다. 시간이 한 참 흘러 인사를 하고 물러나오는데 대문에서 비서가 기다리고 있다가 금일봉을 전해주었다. 집에 와서 보니 적지 않은 금액이기에 조부님께 용돈으로 조금 드리고 아내에게 주었다.

다음날 일요일은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모처럼의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 조부님께 인사차 들어갔더니 조부님은 지니고 계시던 회중시계를 풀어서 주시며 간곡히 말씀하셨다. 조부님의 교훈들 명심하겠노라고 약속드리고 학교로 돌아갔다.

입교 후 2주째부터 가혹하리만치 치열한 훈련이 급진전 되었다. 당시의 학생처장이었던 L대위는 일본군 출신의 장교로 지나칠 정도로 맹훈련을 강행했다. 따라서 성실하게 임하는 자는 장족의 발전이 있었지만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낙오하고 말았다. 2백 명 가운데 3명이 훈련에서 낙오했다.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합격했는데 훈련 중 낙오된다는 일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훈련이 얼마나 가혹했으면 견뎌내지 못하고 포기를 하고만 그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었다.

얼마 전 현재의 육사를 시찰할 기회가 있어서 두루 살펴볼 수가 있었다. 내무반이라기보다는 호텔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10평 쯤 되는 방에 두 사람이 기거하고 있었고 침대와 책상, 옷장 등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의복이나 음식도 우리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급이었다. 이러한 나아진 환경을 보면서 우리가 겪은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난방시설도 없는 방에서 매트리스 없는 철재침대와 모포 3장과 남루한 피복으로 불암산으로부터 불어 닥치는 삭풍을 견디어내는 게 고통이었다. 급식의 양도 그릇을 넘칠 만큼 푸짐한 적이 없었고 맹물에 가까운 우거지 국물에 단무지 한 조각 없는 식단이었다. 그것마저도 없는 날에는 일본군 건빵 한 봉지가 한 끼니 식사였고 썩은 고구마꼬리 한 개로 끼니를 때울 때도 있었다. 새까맣게 썩은 고구마 뿌리를 씹으면 그 맛이 너무 써서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상상도 할 수 없이 고된 훈련을 하자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견뎌내기가 힘겨웠을 것이다. 그러나 장래에 국군장교가 된다는 강철 같은 의지와 차돌맹이 같이 단단한 결심으로 모두들 잘 견디어냈다.

하루는 오전 강의가 끝나고 오후의 야외훈련을 하려고 연병장에 집합했다. 그런데 조교가 다시 강의실로 집합을 하라고 하기에 강의실로 들어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내 자리는 104번이고 103번이 박정희의 자리여서 둘이 언제나 나란히 책상에 앉아 수강을 했다. 그 날도 여니 때와 마찬가지로 그와 나란히 자리에 앉아있는데 학생과장 L대위가 들어왔다. 예감이 이상했다. 난데없이 애국가를 3절까지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해방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절이라 애국가를 끝까지 외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했다. 안다고 해도 겨우 1절 정도이겠지 짐작하며 나 역시 아는 부분만 써내려갔다. 2절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옆자리의 박정희는 어떤가 하고 곁눈질로 보았더니 웬일인지 그는 이미 3절까지 다 쓰고 여유 있게 앉아있는 게 아닌가! 내가 그의 옆구리를 툭 치니 손을 슬쩍 비켜주며 보고 쓰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기회다 싶어 날쌔게 커닝을 해 답안지를 작성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전령이 와서 학생과장의 지시를 전달했다. 당장 학생과장실로 오라는 것이다. 옷을 입고 복도로 나오니 2층 A중대의 박정희 후보생도 두리번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어딜 가느냐고 물으니 학생과장이 불러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와 나는 동시에 학생과장에게 불려간 것이다.

나란히 서있는 우리에게 학생과장인 L대위가 다짜고짜 어느 놈이 베껴 쓴 것이냐며 솔직히 고백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망했다!”싶은 생각과 동시에 체념상태로 눈을 감으로 반사적으로 “옙, 임 후보생입니다!”라고 자백했다. 그런데 거의 동시에 “옙, 박 후보생입니다!”라는 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잠시 동안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L대위의 중재로 이 실랑이는 끝나고 엄중한 언도를 기다렸다. 얼마나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까. L대위의 준엄한 언도가 시작되었다. “두 놈 다 잘했다. 답안지에서 몇 글자가 서로 틀린 것으로 보아 베껴 쓴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더 더욱 분발해야 한다. 알겠나!” 이 말이 그의 언도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어 내렸다. 복도로 나온 나는 박정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더니 그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이런 일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다른 의미에서는 상부상조하는 일이 아니겠느냐.”며 오히려 나를 두둔해주었다. 나는 그 때 그의 큰 그릇됨을 예감했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그와 개인적으로도 가까워졌고 또 그에게서 배운 점도 많았다. 박정희와 함께 철조망 구멍으로 학교를 빠져나가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당당하게 군가를 부르며 정문으로 돌아오기도 했었다. 그 때 위병 선임하사관이 한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후보생님들, 다음에는 나가실 때도 정문으로 나가시죠.”였다. 조만간 소위로 임관하게 될 인물들이라는 것을 이미 계산하고 있는 듯 했다.

이번에는 한 술 더 떠 박정희와 함께 작은 물통을 들고 당당하게도 정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위병 선임하사관이 하는 말이, “다녀오십시오! 그러나 떠들지는 마십시오.”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우리는 한 잔씩 마시고 가져간 물통에 술을 담아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박정희의 만군 동기이며 당시에는 우리들의 교관이었던 최창언 중위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곤하게 잠들어있던 그는 갑작스런 침입에 놀라 일어나 어리둥절해 했다. 밥 보다 술을 더 좋아하던 그는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물통에 들어있는 술을 기울이며 밤 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물통의 술을 다 비우고서야 우리는 각자의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옆 자리의 허암 후보생이 자다 말고 볼 맨 소리를 했다. “이 사람아, 그런 좋은 기회가 있으면 나도 한 몫 끼워줘야지.” 이렇듯 후보생 시절에는 희비곡절도 많았다.

어느덧 졸업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불상사가 발생했다. 나와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던 S후보생이 동향인인 학생과장 L대위를 곤봉으로 난타한 사건이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공식적으로 큰 사건이 되어 가해자인 그는 퇴교를 당하고 말았다. 그 모진 고생을 다 해내고 목표지점이 멀지 않았건만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를 구명할 수 있는 별 도리가 없었다.

1946년 12월 15일의 아침 해가 밝았다. 전 날 밤에 지급된 장교복이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일본군들의 소지품을 담았던 광목포대를 뜯어서 지은 군복에 일본군 하사관들이 신던 소가죽장화, 정모는 턱걸이 끈이 없어서인지 빳빳한 종이에 먹칠을 해 붙였고 지휘도 역시 허리띠가 없어서 허리에 차지 못하고 들고 다니는 방법 밖에 없었다.

연병장에서 마지막 사열과 분열이 있은 후 고관들의 격려사와 다섯 명의 우등생에게는 상이 수여되었다. 수상자 중에는 박정희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나는 안타깝게도 탈락되었다. 내무반에 돌아와 소위 계급장이 부착된 장교복으로 갈아입고 대강당에 모였다. 정종 한 컵과 과자 몇 개로 파티를 끝내고 헤어졌다.

입교할 때 입고 갔던 사복보따리와 그동안 공부한 노트 등을 보자기에 쌌다. 봇짐을 들은 장교의 모습이라니. 지금의 사관생도들이 들고 다니는 007가방이나 근사한 외출용 가방과는 아주 대조적이었으리라. 시내까지 나오는 트럭도 학교에서는 제공하지 못했다. 태릉 역에서 원목을 실은 화물열차를 타고 오려니 모자가 자꾸 날아가려고 했다. 모자에 달린 턱끈을 동여매고 겨우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열 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녀아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로 다가와서 하얀 손수건으로 나의 뺨과 턱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모자 턱끈의 먹물이 땀과 범벅이 되어 얼굴을 온통 엉망으로 만든 것이다. 그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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