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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덮친 알프스 마을, 단 하나의 ‘심장’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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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6-21 15:43 조회 33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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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가 붕괴돼 일어난 눈사태로 파묻힌 스위스 발레주 블라텐 마을의 모습을 2025년 6월6일 항공 촬영한 사진. EPA연합뉴스

스위스 알프스의 마을은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움푹 패인 계곡 안에 들어선 고원 마을은 저 아래로는 맑은 하천과 푸른 목초지, 멀리로는 하얀 빙하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 빙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자 동시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독이 든 장미’와 같다.

얼마 전, 해발 약 1300미터 높이의 계곡에 자리 잡은 블라텐이라는 작은 마을이 그 치명적 아름다움 앞에서 무참히 무너졌다. 주민 300여명이 모여 살던 조용한 마을은 빙하 파편과 돌무더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극이었지만, 참사는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스스로가 위험을 예견하고 대비했기 때문이다. 약 열흘 전에 빙하 아래 설치된 관측 장비들이 이상 징후를 포착했다. 빙하 내부에서 얼음과 암석이 서로 갈라지며 균열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경고였다. 스위스 국립빙하연구소와 지역 행정기관은 곧바로 긴급 회의를 열고, 블라텐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다. 봄비가 간간이 흩뿌리며 쌀쌀했던 늦은 봄날, 주민들은 안전지대로 이동했다. 어떤 저항이나 혼란도 없었다.

마을 아래 놓인 저수지 수문도 함께 열렸다. 빙하 붕괴로 인해 갑자기 밀려드는 물길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산간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수문 관리 기술과 첨단 관측 장비가 공존한 덕분에, 재난은 ‘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

2025년 5월28일, 빙하는 예측대로 무너졌다. 주변 산등성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수천톤의 얼음 덩어리와 돌멩이가 빙하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거대한 망치로 마을을 한순간에 찍어 누르는 장면이었다. 마을 행정 책임자인 동장은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소셜 미디어와 방송을 통해 쉬지 않고 알렸다. 그때마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는 블라텐을 잃고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지켜냈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절망과 안도의 감정이 함께 담긴 말이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인근 마을 주민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봄비 속에서도 전진을 멈추지 않는 구호대원, 온천 마을 식당 주인이 제공한 따뜻한 식사, 목장에서 양젖을 돌려 만든 치즈를 복구 작업자들에게 보낸 목동까지. 마치 산처럼 높은 빙하지대가 한순간에 무너진 날, 그 아래서는 사람들의 따스한 연대가 밑불처럼 타올랐다. 오스트발트 주민들은 블라텐 아이들을 위한 임시 학교를 열어주었고, 파스루더 농가에서는 대피소 운영 인력까지 지원했다.

“우리는 마을을 잃었지만, 심장을 잃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블라텐 마을의 동장이 말했다.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심장’이란 공동체가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을 의미한다. 심장만 남아 있다면, 잿더미가 된 땅 위에도 집을 세우고 목초지를 되살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스위스 연방 정부도 즉각적인 복구 예산을 지급했고, 유럽연합(EU) 차원의 기후재난 지원 프로그램도 가동되었다. 블라텐이 자리잡고 있던 계곡 바닥에는 임시 도로가 깔렸고, 무너진 가옥 터 위에는 주민들을 위한 컨테이너 주택이 설치되었다. 심장을 잃지 않으면, 블라텐의 우리는 기어코 살아낸다는 말.
2025년 5월28일 비르히 빙하가 붕괴되면서 스위스 블라텐 마을이 파괴되었다. 다음날인 5월29일, 한 남성이 염소들을 차에 태우고 이동하려고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2025년 5월28일 비르히 빙하가 붕괴되면서 스위스 블라텐 마을이 파괴되었다. 다음날인 5월29일, 한 남성이 염소들을 차에 태우고 이동하려고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어쩔 것인가. 이제 빙하는 계속 무너져 내릴 것이고, 가뭄의 땅에 물난리가 날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저지른 것을 그대로 돌려받는 자업자득의 현장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되돌리는 노력도 계속 될 것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견디고 버티어야 한다. 공동체와 따뜻한 연대의 심장이 뛰는 한, 우리 인간은 다시 한번 기적적으로 살아낼 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떠올랐다. 민주주의는 거대한 빙하를 지고 살아가는 마을을 닮았다. 민주주의는 한없이 느리고, 때로는 균열을 내포한 체제다. 그러나 그 속에는 ‘경계’와 ‘경청’ 그리고 ‘연대’라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함께 한다. 빙하 관측 장비처럼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지속해서 모니터링해야 한다.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처럼, 여론은 흐르고 쌓인다. 만약 그 흐름이 일정 지점을 넘어 위험해지면, 우리는 모여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머리를 맞대어야 한다.

블라텐 마을 사람들이 그랬듯이, 민주주의는 시민의 목소리를 포착해 시스템이 붕괴하기 전에 위험을 알림으로써 작동한다. 다원적인 관측 장비들은 언론, 시민단체, 사회운동, 소셜미디어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모으고 전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폭넓은 위험을 감지할 수 없다. 그리고 위험이 감지되었을 때, 피차간에 대화를 나누고 절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연대가 없다면 ‘붕괴’는 돌이킬 수 없는 참사로 이어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없다. 우리가 보고 살피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한 남성과 아이가 스위스 남부 발레주에 있는 마을 블라텐에서 빙하가 붕괴되어 발생한 대규모 산사태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수많은 주택이 파괴되고 마을의 상당 부분이 얼음, 진흙, 바위 등에 파묻혔다. EPA연합뉴스
한 남성과 아이가 스위스 남부 발레주에 있는 마을 블라텐에서 빙하가 붕괴되어 발생한 대규모 산사태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수많은 주택이 파괴되고 마을의 상당 부분이 얼음, 진흙, 바위 등에 파묻혔다. EPA연합뉴스

마을이 눈앞에서 무너졌는데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때로는 위기가 닥쳐서 극단적 의견이 난무할 때도 있지만, 그 과정이야말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다. 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대피하듯, 잘못된 정책과 부패를 감지한 시민들은 공론장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때로는 분열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힘이 된다.

붕괴의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선 블라텐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블라텐’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매일 저녁 모여 복구 현황을 공유하고 복구 계획을 논의한다. 설계 전문가와 지질학자도 함께 한다. “마을 재건의 주체는 결국 우리”라는 원칙에 충실하다. 심장을 믿되 행동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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