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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돌아온다, 엄마의 인생을 받아쓰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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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회 작성일 25-04-30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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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의 한 장면. 티캐스트 제공

동그란의 마음극장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배우 까뜨린느 드뇌브와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19년)이라는 영화 속에는 또 하나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갈 때는 세계적인 명성의 두 여배우가 펼치는 치열한 연기 대결이라는 선전문에 이끌렸지만 정작 영화를 볼 때는 영화 속에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더 흥미로웠어요.

이미 만들어진 영화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와 그 속의 모녀를 탐구하는 모녀를 바라보는 나. 이런 겹겹의 설정이 마치 돌림노래가 진행되어갈 때처럼 웅장한 울림 효과를 가져다주는 듯했어요.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사건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다 관객을 옮겨다 놓아요. 우리가 포함된 세계를 이 세계의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게 해주죠.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또 한 번 허구로 구성돼 포함된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바깥의 바깥에 있는 나를 그 ‘진실’에 더 빠르게 접속하게 해주는 것 같았어요.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이 영화의 주인공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는 영화 속에서 제작되고 있는 영화에서 조연을 맡았어요. 주인공이 아닌 조연을 맡는다는 것도 내키지는 않는 일인데, 이 역할의 대사가 좀처럼 입에 붙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요. 그래도 프랑스 영화계의 유망주로 꼽히는 후배와 공연할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애를 쓰고 있어요.

영화의 스토리도 꽤 흥미로워요. 젊은 부인이 불치의 병에 걸려 우주로 떠나 살면서 7년마다 한 번씩 지구의 가족을 방문한다는 내용의 SF영화인데요, 이 병은 지구에 있으면 2년도 못 살지만 우주로 가면 서른일곱 살인 현재의 모습 그대로 늙지도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대요. (이건 마치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은유 같지요. 스크린 위에서 배우는 그때 모습 그대로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지구를 떠난 그녀는 7년마다 돌아와 가족을 만나는데, 어느덧 세월은 흘러 73세가 된 딸을 만나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73세의 딸 에이미 역할을 파비안느가 연기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엄마에게 73세의 딸이 하는 대사가 영 어색한 거예요. “엄마, 또 나 두고 가버릴 거야?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파비안느는 늙은 딸이 젊은 엄마를 만나는 그 어색한 장면을 연습하고 돌아온 날 밤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습니다.

파비안느는 촬영 당일에도 이 장면을 연기하기 싫어서 도망가려고 하기도 했어요. 상대 역을 맡은 젊은 후배 배우에게 공연한 트집을 잡고 계속 툴툴거렸죠. 어쩌면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이 지켜보고 있어서 더 불편했는지도 몰라요. 파비안느는 스크린 위에서는 대단한 존재지만 딸 뤼미르의 엄마로선 많이 아쉬웠거든요. 딸이 기다리는 걸 자주 잊어버렸고 엄마로서 곁에 있어야 할 순간에 부재했어요. 그래서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딸의 대사가 자꾸만 목에 걸리는 건가 싶었어요. 한편 뤼미르는 엄마가 그 장면의 대사를 외우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안달해요. 엄마가 그 장면을 제대로 연기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은 것 같았어요.

파비안느의 딸 뤼미르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어요. 엄마의 회고록 출판을 축하해주기 위해 남편과 딸을 데리고 오랜만에 엄마가 있는 파리의 집으로 돌아와 있던 참에 촬영현장에도 동행하게 되었던 거죠. 사실 뤼미르는 엄마에게 응어리진 게 좀 있어요. 엄마의 회고록을 계기로 그 응어리를 풀어보려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속셈이 있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 회고록을 밤새 읽은 뤼미르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이 책에는 진실이 하나도 없군요.” 엄마가 배우로 사느라 애정을 쏟아주지 못한 딸에 대한 사과는커녕 그런 사실을 반대로 왜곡해 놓은 것에 뤼미르는 분노했어요. 엄마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배우 사라에 대한 언급이 빠진 것도 참을 수 없다고 했죠. 냉담한 엄마와는 대조적이었던 엄마 친구 사라에게 뤼미르는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40년 세월을 하루처럼 파비안느의 일을 돌봐온 매니저 뤼크 역시 파비안느의 회고록 때문에 감정이 잔뜩 상했습니다. 얼마나 서운했는지 이참에 은퇴해서 손주들을 돌보며 살겠다고 선언하지요. “내 얘긴 한 줄도 없더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여배우의 회고록 출판이란, 무얼 위한 것일까요. 적어도 딸과 매니저를 위한 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장 열심히 읽고, 가장 크게 화를 내요. 회고록을 내는 일의 위험성이란 게 바로 이런 거죠. 회고록에서는 언제나 쓴 것보다는 쓰지 않은 것이 말썽을 일으켜요. 저자와 편집자의 손에서 숱한 검토와 확인을 거치고 제작이 완료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된 뒤에야 결정적인 구멍이 드러난다는 것이 출판이라는 사건의 핵심인지도 모르지요. 일단 생겨나고 나면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지요. 책도, 인생도.

파비안느는 실망한 딸을 위로하지도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아요. 대신 이런 주문을 해요. “날 위해 대사를 써주겠니?” 매니저 뤼크를 만나서 할 말을 대본으로 만들어달라는 거였어요. 뤼미르는 신나게 대본을 써요. 엄마 성격상 미안하다, 돌아와 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운데 대사를 친다고 생각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지만 막상 딸의 대본대로 진행이 되질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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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못한 뤼크가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느냐’고 재촉하자 겨우 운을 떼죠. “뤼미르가, 자네 돌아오래. 걘 차 한잔도 제대로 못 만들어. 내 주변이 힘들어질 거야.” 그렇게 대본에 없는 딸 탓을 하며 평소대로 자기 입장만 내세우는 파비안느.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딸에 관한 진실을 말하게 돼요. “나한테서 도망쳐 냈다고 걔는 믿고 있어. 날 피하려고 떠난 걸, 자신은 모르고 있어.” 이 대목에서 난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뤼미르의 꿈이 엄마처럼 배우가 되는 거였다니요. 그 꿈은 못 이루고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서 엄마의 대사를 쓰게 되었다니 아무리 영화이지만 너무 절묘해서요.

딸이라는 존재의 대부분은 엄마의 삶을 읽어내고, 엄마의 마음을 받아쓰기하는 데 바쳐지는 것 같아요. 엄마의 삶에서 무언가가 나올 때까지 파고들지만 대개는 실패하지요. 운이 좋으면 자신이 무얼 찾고자 했는지는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자신의 딸에게서 그 여정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요.

엄마를 보면서 배우를 꿈꾸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뤼미르가 깨닫는 장면에서 악몽처럼, 내가 버린 꿈들이 내게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마가 자길 버려두었다는 사실은 기억하면서 자신이 버린 것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게 딸의 한계일지 몰라요.

이 영화에서, 또 이 영화 속의 영화에서 엄마들은 때로 자신의 삶을 위해 딸을 버려두고 어딘가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못하고 계속 딸에게로 돌아와요. 뤼미르의 엄마도, 에이미의 엄마도 언제나 항상 딸에게로 돌아왔죠. 딸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엄마 앞에서는 어린 딸일 뿐이에요. 그런 그들은 자랄수록 엄마 인생의 구멍들을 후벼 파는 데 선수가 되지요. 엄마가 잊어버린 과거를 들춰내 공격하는 뤼미르. 그녀를 보면서 딸이 없는 내게 없던 딸들이 나타나 나를 원망하는 것을 느꼈어요. 내가 저버린 꿈에게로 내가 계속 돌아가고, 내가 저버린 딸이 계속 돌아오는 것, 어쩌면 이것이 삶이라는 시공간에서 앞으로 내가 만날 전부라는 생각마저 들어요.

인간이란, 자신과 거리를 두기가 어려운 존재입니다. 자신에 대해 제일 모르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죠. 자기라는 존재와 직접 대면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자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이야기라는 가상 세계가 필요합니다. 신들의 세상을 세우고, 영화와 소설이라는 세계를 만들어서 그 속에 자기의 상황을 던져놓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살펴보는 것이죠.

그 세계에 자기 자신을 새겨넣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파비안느 같은 사람이죠. 영화라는 세계에 자신을 던져 넣는 대신 현실 속에서 받는 비난들을 감수했어요. 그랬기에 파비안느는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며 울먹이는 딸 앞에서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예요. “너한테서 용서받는 게 뭐가 중요해? 네가 용서하지 않아도 세상은 나를 인정해. 나쁜 엄마, 나쁜 친구였더라도 좋은 배우인 게 더 나아.”

내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면 딸인 나는 소리치고 울고 난리를 쳤겠지만(뤼미르는 잠자코 있더군요), 예술가 파비안느로서는 참으로 당연하고 떳떳한 말이었다고 생각해요. 파비안느는 어느 장면에선가 이렇게 일갈하기도 했어요. “배우들이 자선을 하고 정치에 뛰어드는 이유가 뭔지 알아? 스크린 위에서 졌기 때문에 현실로 도망치는 거야.”

부드러운 표정 뒤로 상처받은 과거를 껴안고 나타나 상처를 후벼대는 딸. 경쟁자였던 사라의 전성기 시절을 쏙 빼닮은 모습으로 도전해 오는 후배. 까마득한 아래 세대가 어느 날 점령군처럼 밀어닥치는 현실의 공간에서, 제아무리 대단한 파비안느인들 위축되지 않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녀는 당당하려 애쎴어요. 줄담배를 뻑뻑 피워가며 거기 그렇게 버티고 앉아 있었죠.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가 느껴질 정도였어요.

그래요, 이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통해서 증명했듯이 여배우 까뜨린느 드뇌브는 세월이 무색하게도, 스크린 위에서 여전히 이기는 배우입니다. 천하의 줄리엣 비노쉬도 존재감이 형편없이 쪼그라들 정도로요. 하지만 현실의 사생활에서는 어떨는지 알 수 없지요.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요. 어쨌거나 나는 그녀의 그 한마디에 사지에 힘이 쫙 풀리고 말았어요. 멀쩡히 걸어가다 갑작스레 씽크홀에 빠진 것처럼 망연자실이 되었죠. “그들은 스크린 위에서 졌기 때문에 현실로 도망쳤다”던 그 말이요. 나는 어느 세계에서도 제대로 승부를 걸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파비안느를 연기한 까뜨린느 드뇌브는 이 영화에서 두 개의 세계에서 다른 존재로 살았습니다. 멀리 떠난 뤼미르의 엄마 파비안느, 그리고 7년마다 돌아오는 엄마를 붙잡는 딸 에이미. 이 두개의 자아가 자기 안에서 겹쳐지는 순간에 이 위대한 여배우는 뭔가 엄청난 것을 깨달은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녀는 그 순간에도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 아까 이렇게 연기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못했지?”

엄마로서도 딸로서도, 그 두 가지 존재양식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곤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온통 결핍뿐이었습니다. 그 결핍들의 겹침 속에서 그녀는 분명한 것 하나를 건져냈어요.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이 위대한 배우는 더 완벽하게 연기하는 순간만을 원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여기서 이 글을 무사히 마치는 것입니다. 이런 순간이 계속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영화 칼럼니스트 이하영 ha02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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