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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정치인 메르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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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7회 작성일 24-11-29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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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은 ‘엄마 총리’로 불리며 16년간 독일을 안정적으로 이끈 정치적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지난 2017년 9월 메르켈이 총선 운동을 하는 모습. 그라이프스발트/AP 연합뉴스

메르켈 전 독일 총리 회고록 출간
동독 35년-통독 35년, 메르켈의 70년
물리학자에서 정치에 뛰어들어
35년 정치인생 고뇌와 결단 기록


과거 동독에서 학위를 따려면 어떤 전공이든 상관없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시험’을 봐야 했다. 물리학 학위 취득을 앞둔 여성이 시험관들 앞에 섰다. 시험관은 ‘이론과 달리 현실 사회주의에서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문제만큼은 잘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여성은 술술 답했다.

“차를 사려면 7년에서 10년을 기다려야 하고, 해외에 나갈 땐 아주 적은 액수만 환전할 수 있고, 컴퓨터는 최신형이 아닌데다 빠르지도 않고, 휴지를 사려고 몇 시간씩 돌아다녀야 하고, 또…”

7분간 이야기를 이어가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건 함정 질문이야! 넌 지금 아주 위험한 말을 하고 있어.’

“물론 이런 몇몇 사소한 점만 빼면 다른 많은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시험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 최초 여성 총리, 동독 출신 총리, 물리학 박사 출신 총리, 부패 스캔들이 전혀 없는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쓴 회고록 ‘자유’가 독일·미국·중국·한국 등 전 세계 32개국에서 동시 출간됐다. 책은 35년은 동독에서 살다가 35년은 통독에서 살아온 메르켈의 70살 인생을 갈무리한다. 그는 “첫 번째 삶이 없이는 두 번째 삶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동독에서의 삶 없이는 메르켈의 정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다는 거다.

그의 아버지는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쟁의 참상을 겪은 뒤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서독에서 공부를 마쳤지만 그가 사역해야 할 곳은 동독이라고 믿었다. 1954년 아내와 생후 6주의 메르켈을 데리고 동독으로 이주했다. 당시 동독은 파업과 시위가 소련 탱크에 의해 무참히 진압된 지 1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에서 목회자는 감시 대상이었다. 메르켈은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하는 얘기와 집 밖에서 하는 얘기는 철저히 분리했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언제든 도청되고 밀고될 수 있음을 알았다. 학교 교사들은 수시로 그를 일으켜 세워 부모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고, 부모가 목회자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대학 입학도 불투명했다.

모범생이었던 메르켈은 대놓고 싸우기보다 은근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사회주의 홍보 프로그램을 발표해야 했을 때는 엉뚱한 내용의 공연을 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수업 시간에 물리학 과제를 하는 식이었다.

원래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물리학으로 변경한 배경에도 정권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동독 정권도 자연과학적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었다. 2 더하기 2가 4인 것은 만고의 진리였다. 머릿속의 생각을 가위질하지 않고도 내가 아는 것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자 사상검증은 더욱 심해졌다.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 학교 쪽은 ‘개신교 모임에 계속 나갈 거냐’고 따져 물으면서 ‘학생들을 감시하는 일을 하면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친한 의대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의사들은 어떤 정치 체제에서건 분명 열심히 일해야 해. 사람들의 건강과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하지만 물리학자는 어떨까? 우리가 열심히 일할수록 오히려 동독처럼 끊임없이 건강한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개인의 욕구를 억누르는 국가를 도와주는 꼴이 아닐까?”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소에서 일하면서도 회의감과 답답함은 계속됐다. ‘언제까지 이런 삶을 버틸 수 있을까?’ 그러던 중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서독으로 몰려갔고, 새로운 정당과 시민단체가 생겨나고, 처음으로 인민회의 자유선거가 치러졌다. 그의 심장이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연구소에 휴직계를 던지고 시민단체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시민단체에서부터 바로 두각을 드러낸 그는 통일 독일의 첫 연방의회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연방정부의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부 장관을 거쳐, 기민당의 사무총장과 당 대표, 총리까지 쉼 없이 내달렸다.

정치인의 일이란, 끝없는 반대와 갈등 속에서 계속 설득하고 중재하는 일이기도 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 태풍에서 한숨 돌리면 허리케인이 덮치는 식의 일이다. 그는 어떻게 지치지도 포기하지도 때려치우지도 않았을까?

메르켈은 그걸 ‘용기’나 ‘뚝심’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무심함’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그에게 무심함이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감정이 휘둘리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묵묵히 하는 것을 뜻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 시간에 물리학 과제를 풀고, 개신교 모임에 꾸준히 참석한 것은 무심한 성정 때문이었다고. “그런 무심함이 없었더라면 나는 훨씬 쉽게 저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책은 강력한 경제개혁으로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을 구해내고, 2008년 금융위기에서 유럽을 지켜내고, 10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이고, 팬데믹의 위기를 넘기기까지 숱한 정치·경제적 격랑 속에서 그가 겪었던 갈등과 결단의 배경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지 부시, 오바마, 트럼프, 푸틴 등 세계 정상들과의 일화와 그들에 대한 솔직한 인상 비평도 재미난 읽을거리다.

무엇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동독과 서독이 통일해가는 과정이 주는 메시지가 강렬하다. 웅장한 감동으로 부러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는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특히 동독 사람들에게 그 과정은 거대한 상실의 과정이었다. 메르켈의 정치 인생도 ‘동독 출신’이라는 점에 수시로 발목이 잡혔다. “동독 출신의 우리 세대 사람들은 통일된 지 30년이 지나서도 계속해서 통일 조국의 일원임을 증명해야 하나요?” 그가 2021년 말 총리에서 내려오기 전 독일 통일 기념식에서 던진 질문이다.

책은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속도감 넘치는 문체의 빼어난 번역 덕분에 술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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