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좌파의 아이콘인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이 5월 13일 향년 89세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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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아이콘’인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2014년 3월10일 칠레 산티아고의 라 모네다 대통령궁에 도착해 언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산티아고/AFP 연합뉴스
향년 89…남미 좌파 거목·게릴라 출신 생태주의자
“우린 행복이 아니라 부에만 집중”
대통령궁을 노숙자에게 내주고 자신은 원래 살았던 허름한 농가에서 출퇴근했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호세 알베르토 무히카 코르다노 우루과이 전 대통령이 13일 별세했다. 항년 89.
야만두 오르시 현 우루과이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 별세 소식을 알렸다. 오르시 대통령은 “저의 동지, 페페 무히카가 정말 그리울 것”이라며 “그는 대통령, 활동가, 사회의 모범, 사랑받는 어른이었다”고 추모사를 남겼다. ‘페페’(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은 우루과이 정치계 거목이자 국내·외에서 존경받는 좌파 지도자였다. 2015년 퇴임 당시 지지율이 5년 전 당선(52%) 시절보다 높은 65%였다.
2010년 74살의 나이로 대통령이 된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은 실용주의에 기반한 대중적 정치인이었다고 평가된다. 2010~2015년 재임 동안 마리화나 경작과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법으로 제정하는 등 자유주의에 기반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는 대신 마약중독자는 강제 입원시킬 수 있도록 법을 바꾸기도 했다. 우루과이 경제는 연평균 5.4%의 속도로 성장했고 실업률도 낮은 상태로 유지했다. 정치·사회적 혼란이 많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소고기 수출과 축구팀으로 유명한 우루과이를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나라로 평가받도록 변모시켰다.
특히 대통령궁을 떠나 작은 농가에 살면서 월급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해 전세계적으로 큰 지지를 받았다.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도 편안한 옷을 주로 입고 화초 재배 일을 계속한 농부이자 생태주의자였다. 1987년식 폴크스바겐 차량을 몰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다. 5년 단임의 대통령직을 마친 이후 상원의원으로 선출됐지만 세계를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퇴임 전 “소박한 집 한 채에 살면서 낡은 차를 몰고 다닌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갖고 놀라워하다니, 그렇다면 세상은 미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년기의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젊은 시절 무장 투쟁을 벌이던 투사였다. 196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도시 게릴라 운동인 투파마로스 민족 해방운동(MLN-T)을 공동 설립했다. 쿠바 혁명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이 단체는 군사 정부 등에 대한 무장 투쟁을 펼쳤다. 그도 도시 하수구를 누비며 활동했고 여섯발의 총상을 입었다 살아남았으며, 두 번의 탈옥을 했다. 105명의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터널을 통해 탈출한 일은 우루과이 역사상 가장 큰 탈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또 13년 동안 독방 생활을 한 장기수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85년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의 도움 등으로 석방됐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석방된 날이 가장 행복했다”면서 “그 날과 비교하면 대통령이 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1994년 좌파 정치조직 민중참여운동(MPP)을 대표해 게릴라 출신 최초의 하원의원이 됐다. 1999년 상원의원, 2005년 좌파연합인 광역전선(Frente Amplio)이 정권을 잡았을 때 농축 수산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삶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인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등의 책도 출간된 바 있다.
무히카 전 대통령은 지난해 봄부터 식도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치료 중인 지난해 가을에도 총선에서 좌파 연합 승리를 위해 선거운동에 나섰으며 그 결과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오르시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그러나 올해 1월 암이 재발해 간으로 전이되면서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있었다. 유족으로는 전직 무장 대원 출신의 아내 루시아 토플란스키가 있다.
지난해 1월 그는 우루과이 주간지 부스케다와 한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죽어가고 있다”며 “전사는 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아내와 수십년간 가꿔온 몬테비데오 외곽 농장에서 꽃을 키우는 일에 생의 마지막 순간을 바치고 있다며 “삶은 아름다운 여행이자 기적”이라고 되풀이 말해다. “우리는 행복이 아니라 부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무언가를 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알아차리기도 전에 어느새 인생이 지나가 버린다”고 말했다.
향년 89…남미 좌파 거목·게릴라 출신 생태주의자
“우린 행복이 아니라 부에만 집중”
대통령궁을 노숙자에게 내주고 자신은 원래 살았던 허름한 농가에서 출퇴근했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호세 알베르토 무히카 코르다노 우루과이 전 대통령이 13일 별세했다. 항년 89.
야만두 오르시 현 우루과이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 별세 소식을 알렸다. 오르시 대통령은 “저의 동지, 페페 무히카가 정말 그리울 것”이라며 “그는 대통령, 활동가, 사회의 모범, 사랑받는 어른이었다”고 추모사를 남겼다. ‘페페’(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은 우루과이 정치계 거목이자 국내·외에서 존경받는 좌파 지도자였다. 2015년 퇴임 당시 지지율이 5년 전 당선(52%) 시절보다 높은 65%였다.
2010년 74살의 나이로 대통령이 된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은 실용주의에 기반한 대중적 정치인이었다고 평가된다. 2010~2015년 재임 동안 마리화나 경작과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법으로 제정하는 등 자유주의에 기반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마리화나를 합법화하는 대신 마약중독자는 강제 입원시킬 수 있도록 법을 바꾸기도 했다. 우루과이 경제는 연평균 5.4%의 속도로 성장했고 실업률도 낮은 상태로 유지했다. 정치·사회적 혼란이 많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소고기 수출과 축구팀으로 유명한 우루과이를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나라로 평가받도록 변모시켰다.
특히 대통령궁을 떠나 작은 농가에 살면서 월급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해 전세계적으로 큰 지지를 받았다.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도 편안한 옷을 주로 입고 화초 재배 일을 계속한 농부이자 생태주의자였다. 1987년식 폴크스바겐 차량을 몰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다. 5년 단임의 대통령직을 마친 이후 상원의원으로 선출됐지만 세계를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퇴임 전 “소박한 집 한 채에 살면서 낡은 차를 몰고 다닌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갖고 놀라워하다니, 그렇다면 세상은 미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년기의 온화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젊은 시절 무장 투쟁을 벌이던 투사였다. 196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도시 게릴라 운동인 투파마로스 민족 해방운동(MLN-T)을 공동 설립했다. 쿠바 혁명과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이 단체는 군사 정부 등에 대한 무장 투쟁을 펼쳤다. 그도 도시 하수구를 누비며 활동했고 여섯발의 총상을 입었다 살아남았으며, 두 번의 탈옥을 했다. 105명의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터널을 통해 탈출한 일은 우루과이 역사상 가장 큰 탈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또 13년 동안 독방 생활을 한 장기수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85년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의 도움 등으로 석방됐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석방된 날이 가장 행복했다”면서 “그 날과 비교하면 대통령이 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1994년 좌파 정치조직 민중참여운동(MPP)을 대표해 게릴라 출신 최초의 하원의원이 됐다. 1999년 상원의원, 2005년 좌파연합인 광역전선(Frente Amplio)이 정권을 잡았을 때 농축 수산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삶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인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무히카’ 등의 책도 출간된 바 있다.
무히카 전 대통령은 지난해 봄부터 식도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치료 중인 지난해 가을에도 총선에서 좌파 연합 승리를 위해 선거운동에 나섰으며 그 결과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오르시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그러나 올해 1월 암이 재발해 간으로 전이되면서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있었다. 유족으로는 전직 무장 대원 출신의 아내 루시아 토플란스키가 있다.
지난해 1월 그는 우루과이 주간지 부스케다와 한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죽어가고 있다”며 “전사는 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아내와 수십년간 가꿔온 몬테비데오 외곽 농장에서 꽃을 키우는 일에 생의 마지막 순간을 바치고 있다며 “삶은 아름다운 여행이자 기적”이라고 되풀이 말해다. “우리는 행복이 아니라 부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무언가를 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알아차리기도 전에 어느새 인생이 지나가 버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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